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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마음을

2013년 11월 15일 09시 29분 등록

‘피터 래빗’이라는 동화로 유명한 작가 베아트릭스 포터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미스포터>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첫 문장을 쓰면서 즐거운 것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른다는 것 때문이다’

 

베아트릭스 포터는 아마도 나와 같은 유형의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세상에는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는 상황을 즐길 수 없는 사람도 많이 있을테니까요. 그녀와 마찬가지로 저는 열려진 가능성을 무척 사랑합니다. 정해놓고 하는 일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습니다. 물론 무슨 일을 하든 최소한의 안전을 위해 일정의 규율과 울타리는 필요하지요. 그러나 저는 그것 마저도 최소화하고 나머지는 되도록이면 그냥 열어두기를 좋아합니다. 정해진 일만 일어나고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대할 수 없다면 그 일은 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편지를 쓸 때도 무얼 써야겠다는 생각 없이 글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편지를 쓰고 싶다는 마음 하나면 충분하니까요.

 

그런데 사실, 변경연의 마음편지는 좀 신경이 쓰입니다. 제목대로 마음을 담아 쓰면 되고, 그것이 이 편지의 가장 중요한 원칙일텐데도 이상한 부담이 있습니다. 누가 부여하는 것도 아닌데  편지를 쓰기 며칠 전부터 은근히 압박이 오기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읽는다는 사실 때문에 여러가지 부수적인 이유들로 자신을 괴롭히게 되는 것이지요. 아직 내공이 부족해 그런 압박감을 아주 내려놓을 순 없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가 제게 주는 설렘도 있습니다. 대상에 닿고 싶어서 저는 글을 씁니다. 제 자신도 매력적인 대상이고, 내 눈 앞에 지금 보이는 것들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다수의 사람들, 어딘가 나와 닮은 점이 있을 여러분들도 제게는 아주 매력적인 대상입니다. 대상과 소통하는 즐거움이 없다면 그건 이미 제 글의 목적을 잃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설렘 쪽에 더 마음을 실어보기로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 먹는 순간, 제 안에 빛이 들어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썼습니다. 결혼과 함께 저의 일기는 비밀 노트 형태로 바뀌어 그럭저럭 목숨만 연명하게 됐지만 말입니다(제게 결혼은 익명을 보장받지 못하는 닫힌 소사이어티였으니까요). 그러다 2007년 모닝페이지를 만나서 제 마음에 물 길이 났습니다. 그 이야기는 좀 길어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해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일기와 함께 편지 쓰는 것도 아주 좋아하던 사람입니다. 제 인생에서 여러번의 연애가 성공했다면 그것은 순전히 일기를 통해 연마한 편지 솜씨 때문입니다. 사실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제가 보낸 편지를 읽고 저에게 호감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글에 대해 갖는 배짱이나 자신감은 8할이 연애 편지 덕분,이라고 말하는 게 절대 과장이 아닌 겁니다. 

 

다 경험해서 아시겠지만 연애 편지는 일종의 몰입입니다. 내 감정과 상대에 대한 놀라운 집중, 그것이 연애 편지의 핵이지요. 동하면 이미 마음 속에서 편지가 시작됩니다. 그런 워밍업 때문에 편지지를 펼치면 곧바로 글이 달리게 되지요. 마음에 이끌린 편지는 못말리는 한 편의 즉흥  춤사위와 같습니다. 서서히 고조되다가 클라이막스에서 폭발하고 점차 정제를 거쳐 인상적인 엔딩에 도달하지요. 편지 한 통을 마치는 순간은 한 우주를 얻는 순간입니다. 저도 대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을 모두 감싸안을 듯한 충일함만 남게 되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연애 때문이 아니라 '연애 편지를 쓰는 경험' 때문에 참으로 많은 것을 얻은 것 같습니다. 마음이 따르지 않는 것은 가짜요, 애초 금기를 만들고 금을 그은 건 우리 마음일 뿐 정해진 길은 원래 없다는 것, 스스로의 존재감이 없으면 세상에 밀려 혼돈에 빠지게 된다는 것, 같은 것들 말입니다. 

 

사실, 지난 편지 이후 한 달 동안 저는 지독한 우울과 지독한 기쁨을 모두 경험하며 좀 더 자신에 대해 탐구할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행인 건 우울에 계속 빠지지 않고 그 우울 때문에 내게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남의 목소리가 아니라 내 목소리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목소리를 듣고도 그것을 소중히 지키지 못하면 또 흔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인 건 그런 흔들림의 반복을 통해서도 내가 행복해지는 방향 쪽으로 더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2008년 연구원이 되고 나서 5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꿈벗에 참여한 것을 시점으로 하면 더 긴 시간입니다.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동안 그 어느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조차 쉼 없이 경쟁하며 달리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이나 온 이후, 그 어느 순간도 나는 답을 모르지 않았다는 것을, 진짜 필요한 건 여전히 '정직함'이고 그것을 지켜낼 '용기'라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저기 어딘가(out there)에서 답을 찾으려는 유혹은 내 자신에 대해 시간을 충분히 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갖는 공통의 두려움입니다.

 

어제는 저의 <어바웃미데이>였습니다.  'the Path of Heart'라는 제목으로 저의 45일 남미 여행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와인'을 마시며 '사람'들과 '여행' 이야기를 '하트'로 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두 주 동안 'Duo A&U'의 김미영(바이올린) 선생과 김정열(클래식 기타) 선생, 그리고 그분들과 팀이 되어 '렉처 콘서트'를 여시는 건축가 김억중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세 번의 각기 다른 만남, 연 12시간의 대화. 직관을 따라 살아온 이분들의 명쾌함 때문에 참으로 즐거웠습니다. 제 고민의 실타래를 푸는 과정에서 암암리에 이분들의 생각에 큰 빚을 졌습니다. 12월 7일 이분들을 모시고 크리에이티브 살롱9에서 <제2회 살롱음악회>를 엽니다.  음악회 공지와 함께 이분들과 인터뷰한 내용은 곧 따로 전해드리겠습니다. 시간을 비워두세요. 절대 후회하지 않을 공연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그날 참석하시는 분들은 아주 작은 것으로 변경연의 문화지형도를 바꾸는 일에 깜짝 놀랄만한 기여를 하게 될 것입니다.

 

미래를 알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이렇게 멋진 흥분일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그러니 살아봐야겠다. 다시 살아봐야겠다. 매일 아침 해가 떠오를 때마다 한 번 다시 살아봐야겠다. 구본형 <신화읽는 시간> 258
 
계속 이어가고 싶지만 오늘은 여기서 편지를 마쳐야겠네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모닝페이지 방식으로 일단 한 문장을 적는 것으로 시작한 편지였습니다. 문장 하나 시작하는 것이 때론 무척 어렵지만, 일단 펜을 들고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은 마음이 이끄니까요.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어 불안하다구요?"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대답할 겁니다.

 

"천만에요. 다만 궁금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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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5 12:18:49 *.34.180.245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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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6 13:18:29 *.232.224.243

몰입과 집중...연애편지의 핵심 맞습니다...ㅋㅋ

문학 소녀 문학 소년을 꿈꾸는 시기가 바로 연애편지를 쓰기 시작하는 그 타이밍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궁금하다. 알고 싶다. 연애의 시작이고 관계의 시작이고 심장의 펄떡거림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후루룩...글에 몰입감이 매력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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