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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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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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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0일 21시 49분 등록


추석을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결혼제도에서 빠져나온 제게는 명절도 평일과 똑같습니다. 다만 차례상 차리느라 힘들던 시기를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생산성있는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지요. 하루에 책 한 권 읽기, 두 시간 영어공부 하기, 산책 한 시간의 목표를 철저하게 지키는 거지요. 오늘은 영화 한 편 보고, 외식도 했습니다. 평소에 출근을 하지 않는데도 연휴에는 좀 더 놀아줘야 할 것 같은 압박이 있네요.^^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결혼생활 후반에는 명절 풍경이 꼭 무슨 퍼포먼스 같았던 기억입니다. 시골 잔치를 다섯 번이나 치룬 맏며느리였지만, 학원을 운영하기 시작한 뒤로는 부엌 일이 손에서 떠서 명절이 정말 힘들었거든요. 오래 된 조상은 커녕 얼굴도 모르는 애들 할아버지에게 추모하는 마음이 생기지도 않았고, 자발성이라곤 결여된 채로 좀비처럼 정해진 순서를 치르다 보면 도대체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던 차례의 의무에서 벗어난 지 십 수 년, 조금도 결혼생활을 그리워한 적이 없는 것을 보면 제게는 결혼의 울타리가 영 어울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결혼 뿐만이 아니라 굳이 소속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밀접하게 지내는 사람들도 희소한 자신을 보며,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치부하며 살았는데......

 

노명우의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에 이런 성향을 '자기밀도'가 강하다고 표현해 놓았네요. 사회인은 누구나 개성을 지닌 고유한 존재인 동시에  남편이나 아내, 아빠나 엄마, 직장인의 역할을 겸해야 하는데, 역할에 대한 요구는 스스로 결정할 수가 없고 전적으로 시대의 요구라고 합니다. 자기 내면이 아니라 사회적 과정에 의해 형성된 것을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에 "일반화된 타자"를 참조할 수밖에 없다구요. 중요한 것은 개인이 연출해야하는 페르소나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주체로서의 자아는 줄어든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가 제로섬의 관계라고 저자는 단언하고 있네요. 좋은 부모, 완벽한 직장인이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즉 역할밀도가 짙어질수록 주체로서의 자아 - 자기밀도는 작아진다는 것, 충격적이지 않나요?

 

친정엄마를 비롯해서 윗세대에게 느꼈던 의문이 풀리는 기분입니다. 친정엄마는 팔순이 되시도록 가족 이외에는 어떤 관심사도, 어떤 영토도 밟아 본 적이 없습니다.  오랜 세월을 가족에게 헌신했지만 이제 와서 그 노고를 알아주는 자식은 없습니다. 엄마는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내주었고,  지금도 오직 자식만을 기다립니다. 그런 자식 해바라기가 오히려 엄마를 초라하게 만듭니다. 엄마가 우리를 기다릴수록, 우리가 놀아주기를 바랄수록 우리는 엄마에게 죄책감을 느끼지만 엄마의 말상대를 해 드릴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0분에 불과하지요.  인생과 노화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저는 몇 번이고 엄마의 인생을 시뮬레이션 해 봅니다.

 

서울에서 집 있으면 됐고, 신체 건강하고 성품 좋은 엄마가 왜 이렇게 밖에 노후를 보내지 못하는지,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말입니다. 결론은, 엄마는 한 번도 개인으로 선 적이 없었다는 생각입니다. 한 번도 자식과 분리된 적이 없어서 같이 늙어가는 우리를 아직도 열 다섯 살로 취급하고, 배려와 참견을 계속하시지요. 엄마의 그런 태도는 지겨움을 유발하고, 자식과 함께 있고자 하는 엄마의 염원은 점점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이 되어 갑니다.  그런 엄마가 장성한 자녀를 둔 내게 반면교사가 됩니다. 관계밀도(역할밀도)와 자기밀도의 절묘한 균형!  그러나 책에도 나오지만, 기존의 역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일반화된 타자"가 없어서 스스로의 힘으로 상황을 돌파해야만 합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역할밀도 쪽으로 편중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새롭게 균형을 잡아 나가는데 여행이 도움이 됩니다. 여행 중에는 하나의 개체로 거듭나는 경험을 할 수 있거든요. 저는 원래 단출한 관계망 속에 지내고 있었는데도 여행 중에 스스로를 한 개의 점으로 느끼곤 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이리 저리 엮인 느낌이 강한데 그 연줄이 탁 끊겨 나가는 거지요.  우리 사회 특유의, 정상적인 사회인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규범이 사라지고, 세월호 처럼 어이없는 사고에 대한 비통이 사라지고, 도대체 누가 뭘 하는지도 모르겠는 정치판에 대한 울화통이 사라지고,  아이돌 소식으로 도배해 놓은 포털 화면이 사라지고,  심지어  나이에 대한 인식도 사라집니다. 이 느낌은 꽤 강해서 두렵기까지 합니다. 어떤 돌발상황이 벌어진대도 상식과 언어가 다르고, 도와줄 인맥이라곤 없으니,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오직 '나'라고 하는 개체의 두 발로 서 있다는 인식은 다시 한 번  나와의 관계를 정립할 수 있게 도와 줍니다.  어디까지를 역할로서의 내가 수용할 것인지, 무엇이 존재로서의 내가 지향하는 궁극인지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내 엄마 같이 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만 할 뿐, 어떤 엄마가 될 지는 이제부터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그래도 나에게 적합하고 내가 원하는 관계밀도를 향해 준비하고 걸어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뿌듯합니다. 저는 아무래도 돌봄이 강한 모성보다는, 자녀에게 인정받는 엄마를 지향할 것 같습니다. 자녀에게 부채감이 들게 하는 엄마가 아니라,  바라보면 가슴이 환해지는 수퍼문같은 엄마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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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1 05:10:15 *.235.74.185

인간이란 존재는 불편한 것에 대해서 조금씩 조금씩 불만을 쌓아가다가 나중에는 없애버리는 존재이지요.
명절날 제사지내는 것이 예전에는 가족친척 다 모이게 해서 즐겁게 지내는 것으로 좋게 인식되었지만 이제 시대가 변해서 그런지 명절은 스트레스의 대상이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때에는 부모가 죽으면 3년상을 치뤘다고 하죠.
3년동안 부모 무덤 옆에서 움막짓고 그곳에서 밥해먹으며 매일 제사를 지내며 부모를 추모했다고 합니다.
당시의 세상은 이런 것을 자식된 도리라고 했으며 효자라고 치켜 세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런 것은 미개한 짓이란 것을 대한민국에 사는 개들도 알 것입니다.
그리고 차례상에 음식을 놓고 제사를 지내면 죽은 조상의 혼령이 와서 그 음식을 먹는다고 하는데..
나는 마치 무슨 저 먼 안드로메다의 별나라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황당합니다.
귀신이 와서 음식을 먹고 간다니...
참으로 해괴하고 괴이한 짓을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울 따름입니다.
한국의 이런 미개한 제사는 저 아프리카의 오지의 미개한 원시부족사람들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명절이 인간의 삶을 불편하게 하고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라면 명절은 당연히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법과 제도는 사람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지 사람이 법과 제도를 위해 존재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물론 아직도 제사를 지내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한국사람들은 나의 말에 어처구니없어 하며 반사회적인 인식이라고 비난을 하겠지만
조선말에 머리카락을 자르라는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부모가 물려주신 신체의 일부를 자르는 것은 불효라며 차라리 목숨을 자르면 잘랐지 부모님이 물려주신 머리카락을 자르지는 않겠다고 저항했었다고 하는데 그때의 단발령에 저항하던 모습과 나의 제사폐지에 대한 것에 비난하는 것을 나는 똑같이 보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조선말의 단발령을 보노라면 너무나 미개했던 조상들의 사고방식에 웃음까지 나옵니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이 불효라는 그 미개한 사고방식을 가졌던 시대의 문화인 제사를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한국이 미개한 관습에 휘둘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백년 후에는 한국에서도 오늘날의 미개한 명절제사문화가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조선시대때의 미개한 부모 3년상이 없어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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