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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마음을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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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3일 00시 59분 등록

 

유리알처럼 맑고 동화처럼 정직하고 늘 첫사랑처럼 순수했던 사람, 나에게는 둘도 없이 막역했던 벗, 그 사람. 마흔 여덟에 제대로 나눈 작별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 아직 열여덟도 다 채우지 못한 아들과 그보다 두 살이나 더 어린 딸과, 첫사랑으로 만나 함께 살아온 아내와 외아들을 잃은 노모와 넷이나 되는 오누이들과 그의 영정 사진을 옆에 두고 황급히 달려온 친구들이 둘러 앉아 소주병을 연신 비운 다음날.

 

약속대로 시인 박남준 선생님이 숲으로 오셨습니다. 좋은 시집을 읽을 때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시인의 눈은 어떤 거지? 도대체 시인은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보기에 그들의 언어는 이토록 맑을까?’ 벗과 그 가족 곁에서 마지막 가는 사흘을 다 지키고 싶었지만, 시인을 모신 공부모임에서 기대하는 내 자리를 외면할 수 없어 잠시 빈소를 빠져나왔고, 여우숲 숲학교 교실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슬픔을 온 몸에 머금고, 시인이 들려주는 시를 들었습니다. 낮게 음악이 흐르게 하고 시인은 먼 산을 응시하며 자신의 시를 읽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눈을 감고 시인의 호흡을 따라갔습니다. 시인의 눈으로 시 속의 풍경과 마주했습니다. 시인의 슬픈 노래에서는 나도 가슴이 터질 듯 슬펐고 반짝이는 노래에서는 나도 일렁였습니다.

 

노랑의 꽃 무덤

눈발이 흩날리는 마당에서 만났다 / 축대 한쪽 여태 초록을 거두지 못한 채 / 시절을 넘긴 머위 잎 위에 / 노란, 무척이나 노랑이 눈에 띄었다 / 작은 나뭇잎인가 이 삼동의 뜨락에 / 평소 전혀 곁을 주지 않던 녀석 / 무섭게 인기척을 알아차리고 / 낫 나풀 날아가버리곤 했지 /

삶이 다한 것인가 / 살며시 잡았다 노랑 날개 / 잎에서 떼어지지 않는다 / 저 가녀린 거미줄 같은 발가락으로 /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을, / 생의 마지막을 그렇게 꼭 붙잡고 있었던 것이냐 / 누군가의 죽음도 그럴 것이다 / 차마 놓지 못하고 눈감지 못하고 /

시든 머위 잎을 끊어 방에 들어왔다 / 가만있자 저 나비 꽃 무덤을 마련해볼까 / 아직 피어 있는 쑥부쟁이나 산국꽃 위에라도 /

바람이 불고 다시 또 눈발이 날린다 / 마당가 꽃이 진자리마다 / 내 눈에는 이 세상 온통 노랑의 꽃 무덤이다 박남준 시집 <중독자> 중에서-

 

눈을 감고 따라간 시인의 시선과 펼쳐놓고 굼벵이처럼 읽은 시인의 시집에서 나는 아주 조금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 시인의 시선은 저런 것이구나. 놓치지 않는구나. 삶에 찌든 눈에는 마냥 하찮을 사태와 사연이 시인의 눈에는 아픈 사건이 되고 신기 방통한 신비가 되거나 함께 나누지 못해 미안한 슬픔으로 찾아드는 것이구나. , 시인의 마음에는 고감도 감응의 센서가 장착돼 있나보다. 그러니 아, 시인은 때로 얼마나 아플까. , 그러니 시인은 또 얼마나 노래하고 춤추고 싶을까. 모진 세상 살아남기 위해 갑옷과 가면과 분칠 따위로 덕지덕지 무장한 우리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그의 눈에는 보이고, 감응되지 않는 사태들이 모두 그의 가슴으로 스미고 고여 시가 되니 시인의 눈과 마음은 얼마나 순결한 것인가.’

 

밤늦도록 이어진 숲학교의 뒷자리를 나는 먼저 털고 일어났습니다. 아침 일찍 먼 길을 떠나는 벗을 배웅하러 빗속으로 가야하므로. 뒤에 들으니 시인은 인()시가 되도록 자리를 지켰다고 합니다. 경향 각지 참된 삶을 고민하러 모인 이들에게 술잔을 주고받았으며 시 몇 편을 더 읽어주었고 노래도 불러주었다고 들었습니다. 기쁜 시 한 편처럼 하루를 보내고 나의 벗 화로 속에서 재가 되어가는 시간 시인은 지리산으로 다시 길을 놓으신 모양이었습니다.

 

항아리 속에 담겨 나올 벗을 기다리는 사이, 비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빗속에서도 그가 머물 공원의 앞산은 노을처럼 타오르는 붉은 가을로 가득했습니다. 벗이 기거할 새로운 집이라는 그 항아리는 따뜻했고 나는 어루만지며 눈물로 고백했습니다. ‘그대가 나의 친구여서 참 좋았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그대가 그리울 게다. 혹은 그대와 내가 청춘에 함께 들었던 노래가 어느 거리에서 흐를 때에도 그대는 나와 노닐 것이고, 떠나기 전 함께 걸었던 산성과 공원에서도 나는 그대를 마주할 것이다. 함께 올랐던 지리산, 함께 걸었던 길, 함께 벌거벗고 놀던 개울가, 그리고 음식점, 그대가 붙들고 주정을 하던 변기까지나는 그 모든 것에 감응하며 그대를 곁에 있는 존재처럼 기억하고 사랑할 것이다. 사랑한다. 나의 벗.’

 

벗을 보내고 돌아온 저녁 밤이 늦도록 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걸었습니다. 이슬 같은 가랑비가 내리는데 내 어깨는 그 작은 습기를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한기가 전해왔습니다. 돌아와 방에 누우니 천정이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소용없는 생각도 춤을 추었습니다. ‘아주 잘 감응하는 눈과 마음을 가진 이가 시인이라면 세상에 시인이 더 많아져라. 꽃 한 송이, 나비 한 마리의 열망에 더 잘 감응하는 인간, 아이들의 열망과 호기심에 더 잘 감응하는 부모, 학생들에게 더 잘 감응하는 선생님, 백성에게 더 잘 감응하는 정치인도처가 시인의 눈과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채워져라.’ 마음은 어지럽고 잠은 오지 않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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