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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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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6일 03시 43분 등록

바르나8_064.jpg



여행을 오면 딸이 권력자입니다. 검색과 지도 보기, 계산에 능해서 숙소예약이며 낯선 길 찾기, 회계업무를 맡아 하거든요. 그럼 저는 무얼 하냐구요?  짐 들고, 요리하고, 열심히 따라 다니지요.^^   딸이 지도를 보는 안목은 날로 단련되어 이제 어디를 가든 단 한 번의 시행착오도 없이 숙소를 찾아갑니다. 어리버리한 저는 이박삼일이나 되어야 비로소 지리가 눈에 들어오는 식이니 딸의 그런 재능이 신출귀몰하게 느껴질 정도지요. 그런데 정작 딸에게 감탄하는 것은 길찾기가 아니라 돈에 대한 것입니다.

 

딸은 돈에 대해 아니 지출에 대해 굉장히 엄격한 자세를 갖고 있습니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20대가 되면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더니 스물다섯 살이 된 지금, 더구나 여행길에서는 훈육장교 저리가라 할 정도로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네요. 아직 어리다고 해도 좋을 나이에 겉멋이라곤 전혀 없이 실용성으로 뭉친 딸을 보면, 낭만파에 충동구매를 일삼고, 한정치산자에 가까운 경제감각을 가진 저로서는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백해무익한 커피를 왜 마시느냐는 통에 커피 마실 때마다 눈치가 보이는 식으로, 근검절약하던 60년대 세대의 기준을 가진 딸과 저는 모녀역할을 제대로 바꿔서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얼마나 자기 기준에 엄격한지 계획대로 안 되면 숨이 넘어갈 지경이니 매사에 널널한 저는 제가 진짜 철부지처럼 느껴지곤 하는데요, 어제 같은 경우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아파트를 얻었지요. 매식 특유의 얕은 맛에 질리고, 어차피 사 먹어도 빵인지라 우리는 아파트를 얻어 취사하는 것을 원칙으로 세웠는데, 마침 일요일이라 한 군데도 마트를 연 곳이 없는 거에요. 이것이 문화라는 건지 어쩌면 도시 전체에 일요일에도 돈을 벌고 싶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단 말인지, 저는 마트를 찾아 헤매는 딸을 따라 다니며 오히려 거기에 놀랐는데요, 문제는 아파트가 2인실 호텔보다 10유로가 비싸다는 점이지요.

 

식비를 절약하고 밥 해서 고추장 비벼먹으려고 아파트를 얻었는데, 그걸 못 하니  딸이 노랗게 변해 갑니다. 신경쓰느라 입맛을 잃고 때가 지나 소세지 굽는 냄새만 맡아도 메슥거린다는 딸과 역전의 분수대 옆에 누웠습니다.  한 두 번 겪는 상황은 아니지만 여전히 신기합니다. 나 같으면 1분 만에 포기하고, 적당한 음식 찾아 사 먹고, 내일을 기다릴 테니 말이지요.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 신기해서 이런 대화를 나눈 적도 있으니 말 다 했지요.

 

"도대체 너 같은 애가 왜 내 자궁을 필요로 했을까?"

"글쎄, 넓어서?" 

"......"

 

하지만 어찌 생각하면 다른 것이 당연하지 싶습니다. 아무리 모녀라고 해도 엄연한 개체인데, 독립된 인격 사이에 다름이 없다면 한 쪽이 너무 강해서 흡수하거나 억압하는 것이지, 자연스러운 관계는 아니지 않을지요?   돈을 운용하는 감각이나 기준이 어찌나 철저한지 거듭 감탄하다가,  수없는 자괴감도 겪다가, 그렇다면 나는 무얼 잘 하나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감탄을 잘 한다"였습니다. 딸이 지도를 볼 때, 저는 하늘을 봅니다.  딸이 마트를 찾을 때 저는 거리의 사람들을 봅니다. 딸이 계획에 딱 맞는 지출에 열광할 때, 저는 한 장의 사진에 가슴 설렙니다. 저 사진은 불가리아 제3의 도시 바르나에서 찍은 것인데요,  바르나가 워낙 밋밋하고 허름해서  며칠 동안 사진 한 장 찍을 일이 없다가 골든샌드 해변에 가서 찍은 사진이라 더욱 신이 났습니다. 어찌나 날씨가 화창한 지 제 낡은 디카로도 저런 화질이 나온 것이 좋아서 사진을 쓰다듬고 싶을 정도였지요.  그 날 하루를 성공적으로 보낸 것 같아 뿌듯했구요. 아! 나는 내 맘에 드는 한 장의 사진, 한 편의 글에 죽고 사는구나.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딸과 달라서 실용적인 사람이 아닌 것을 자책하기보다, 쓸 만한 사진 한 장, 글 한 편을 생산하지 못한 것을 더 부끄러워 할 일이로구나.  

 

사주에 대한 호기심이 생길 정도로  극단적으로 다른 딸과 붙어 지낸 90일의 여행이 끝나 갑니다. 딸의 실무적인 지능에 기대느라 부대낀 적도 있었지만, 결론은 행복한 동행입니다. 저는 속이 안 좋다며 얼굴마저 해쓱해진 딸을 달래서 초밥을 서너 개 먹였습니다. 그리곤 월요일 아침 마트가 열기를 기다려 쌀과 소세지, 야채를 사다가 아침은 물론 점심도시락까지 쌌습니다.  상대가 무엇에 중점을 두는지, 무엇으로 행복해 하는지를 파악하여 맞춰주는  것에 능해지고, 더불어 내 길에  대한 확신이 더욱 강해진 기분입니다.

 

문득 그대의 하루를 기쁘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해지네요. 바로 거기에 자기다운 삶의 단서가 들어 있을 테니 유심히 살펴 보세요. 만약 그게 전무하다면 심각한 위험신호가 될 수도 있으니 종합점검도 해 보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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