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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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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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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29일 13시 29분 등록


명색이 글쓰기강사면서 폭넓게 고전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켕길 때가 있다. 니체나 장자 정도는(?) 익숙하다 해도 푸코와 들뢰즈에 이르면 갑갑할 때가 많았는데 아무래도 읽어야 할 것 같다. 강민혁의 <자기배려의 인문학> 덕분에 든 생각이다.

 

중년의 은행원인 그는 6년 전에 술 담배를 끊고 홀로 찾아간 수유+너머에서 새로운 삶을 얻었다고 한다. 주말마다 모여 고전을 읽었고 우정의 공동체를 얻었다. 그런 경험이 사회생활에서 겪는 두려움은 두려움조차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주어서 그는 감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은행원이고 평범하지만, 내가 딛고 있는 세계는 이전과 달라졌다. 지금 나는 다른 사람이다.”

 

그가 푸코에게서 처음 접했다는 자기배려는 힐링이나 자기계발과 완전히 달라, ‘단 한 번도 되어 본 적이 없는 자기가 되는 실천으로 자기해체에 가깝다. 푸코는 이 개념이 그리스 로마 철학은 물론 플라톤에서 니체에 이르는 철학사 전반에 드러난다고 주장했는데, 저자 역시 그간의 공부를 자기배려에 빗대어 정리했다.

 

5년 공부로 이런 문장이 가능한가? 그의 수려하고, 의연하고, 폼나는 문체는 은행원이라는 상식적인 직업과 대비되며 더욱 극적으로 다가 온다. 나는 그가 읽어주는 고전에 기꺼이 포섭된다. 흔해 빠진, 아니 이 시대의 성인이 입에 담으려하지도 않는 어휘 우정에 대한 안내를 받아보자.

 

여자와 노예, 심지어 창녀까지 포함된 우정의 정원을 만들어 철학하다, 죽을 때가 되었을 때 그 구성원들에게 모든 것을 남기고 떠난 에피쿠로스는 우정이 분명 현실적인 유용성에서 출발하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이 더 중요하기에  도움을 자주 요청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키케로는 우정이 우리의 본성이라고 말했다. 만일 우정이 외로움이나 무서움을 피하려는 데서 성립된 것이라면, 의존적인 관계의 위장에 불과하지만, 유용성은 우정이 산출하는 여러 가지 효과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

 

"누구나 자신을 사랑하지만, 그것은 사랑한 대가를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이네. 그리고 이와 똑같은 감정을 우정에 적용하지 않는 한 진정한 친구는 결코 구할 수 없네. 진정한 친구는 제2의 자아이기 때문이네" 키케로

 

진정한 친구란 제2의 자아이기에 우정은 결정적으로 자기와 맺는 관계로 수렴된다. 의존적인 혹은 퇴행적인 자기를 끊임없이 깨 나가야 하기에 정치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앞에서 자기배려단 한 번도 되어 본 적이 없는 자기가 되는 실천이라 했으니, 우정이야 말로 자기를 해방시키고 확장시키기 위한 실존적인 선택이 아닌가! 여기에서 저자는 니체의 인용구, “너는 노예인가? 그렇다면 벗이 될 수 없다. 너는 폭군인가 그렇다면 벗을 사귈 수 없다를 쾅! 하고 울린다. 전에는 철학자들이 상식적인 문제를 어렵게 파고드는 사람이라고 여겼더니 그게 아니었다. 철학자들은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은폐되고 포기되는 관성을 멈추고 새로운 사고를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었다. 나는 비로소 관계에 인색한 나를 설명해 낼 수 있는 근거를 얻었다. 나는 노예도 싫고 폭군도 싫었던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 저자가 이토록 빠른 시간에 철학과 글쓰기의 달인이 된 비밀이 나와 있다. 처음에는 그도 우리처럼, 세련된 생각을 해야 멋진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란 것이 하늘 아래 새로운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주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변형시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바, 언어가 이 형태변환을 가능하게 해 주는 각별한 산물이라고 여기게 된다. 생각하니까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니까 생각하게 된다는 전이가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닮고 싶은 책을 베껴서는 이리 바꾸고 저리 고치면서 수많은 조립품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문장공부를 한다.

 

소설 <임꺽정>의 인물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과제를 한다고 치자, 우선 내가 쓰려는 글의 줄거리를 세밀하게 정리하고, 등장인물과 사건들의 선후관계를 따져 놓고는, 루쉰의 <죽음을 슬퍼하며>를  똑같이 베껴 쓴 뒤  문장 하나하나를 내 줄거리에 맞게 고쳐 쓰는 방식이다. 한 문장에 최소 두세 개씩의 다른 문장이 나왔다. 그중에 가장 적합하다고 느끼는 문장을 선택하고 나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갔다. 그러면서 루쉰의 문장 스타일을 하나씩 정밀하게 익혔다. 다른 과제를 할 때는 같은 방식으로 벽초의 스타일을 익혔다니 저자의 치밀함에 혀가 내둘러진다.

 

그러는 과정 자체가 생각을 만들어내, 글이 글을 썼다. 마치 마술 같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고미숙을 흠모하면서도 그 철저함이 두려워서 가까이 가지 않았는데, 고미숙의 제자를 통해 마음이 동한다. 불과 5년간의 공부를 통해 평범한 은행원이 인문학 서적의 저자로 변신한 경로가 궁금하다. “수유+너머를 발전적으로 해체, 분화시킨 서당의 하나인 그녀의 의역학연구소 감이당을 검색해 봐야겠다. 나는 그들처럼 치밀하고 철저해 질 수 있을까. 전에 단 한 번도 되어 본 적이 없는 내가 될 수 있을까? 이런 망설임, 이런 두려움, 움직여야 한다는 필요와 욕구는 목구멍까지 차 올랐는데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 내가 여행을 결심하기 직전의 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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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30 09:14:09 *.37.122.77

마침 수유너머의 일원이었던 고병권의 <철학자와 하녀>를 읽고 있습니다.

<길들여지는 아이들>에 이어져 만나게 된 책이지요.

뭔가 고민은 계속되는데, 함께 공부할 사람은 없고...

본론으로 무찔러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에만 머무는 느낌이 드는 요즘입니다.

연구원 1년 과정을 마치고 홀로 공부해가는 시간이 만만치 않습니다.

함께 공부할 공간과 부딪힘이 그리워지네요.

 

 

<!--[if !supportEmptyParas]--> <!--[endif]--> => 요걸 안나오게 할 방법은 없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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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31 09:01:57 *.230.103.185

양갱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요.

과감하게 주도역할을 맡아- 목 마른 자가 샘 파는 것이므로- 취지를 설명하고 공지하면 함께 하는 사람이 있을 듯~

자발적이고 역동적인 소모임이 많아지면 좋겠네요.


end if~ 때문에 왕 짜증나요. ㅋ  한글프로그램을 새 것으로 써 보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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