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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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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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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23일 12시 18분 등록

김.jpg


어떻게 진짜 농사꾼보다 더 농사꾼 같으세요?”

집안으로 안내받아 앉자마자 농담을 건넨다. 그 정도로 그의 모습은 친근한 데가 있었다. 강단있는 체구에 홀쭉한 뺨이 깊게 패인, 전형적인 농사꾼의 모습. 어떤 회사 작업복을 물려 받았는지 대기업의 로고가 박힌 작업복에 고운 때가 묻어 있다.

진짜 농사꾼이니까 그렇지요.”

그도 기분 좋게 받아치며 교직에 있을 때 학생들이 그에게 농사꾼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곳에 와 있다는 말일 게다. 김광석을 닮았다고 하니, 정태춘 닮았다는 소리는 가끔 들었다고 한다.


농가답게 곡식자루가 세워져 있고, 바쁜 일상을 드러내듯 옷이며 신문더미가 쌓여져있는 거실은 그러나 위풍이 당당했다. 보와 기둥에 아름드리 통나무가 드러나 든든한 골격을 자랑하고, 천장이 높아 시원한 느낌을 주며, 밭이 내다보이는 유리창은 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컸다.  내가 집안을 둘러보자 그가 해명하듯 말을 건넨다.

농사짓는 집치고는 너무 좋지요? 집사람이 원치 않는 농촌생활을 하는데 집이라도 좋은 곳에서 생활하게 해 주고 싶었어요.”


그들 부부는 고향 친구이다. 시골에서는 중학교까지 죽 같이 올라간다. 어린 시절의 연정만큼 가슴 설레는 것이 또 있을까. 공연히 좋아라 하며 언제부터 좋아했느냐고 하니 중1때부터라고 한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나와 교사로 근무하던 김계수 씨가 귀농을 결심했을 때 아내의 반대가 만만치않았다. 누구보다 농촌 실정을 잘 알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런 아내는 교사로 살라면 살겠다. 그러나 그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그의 엄포와 절망때문에 억지로 따라왔다. 그의 아버지는 워낙 연로하셔서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고, 평생 장남의 뜻에 반대한 적이 없는 어머니역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는데, 성격이 불같은 장인어른께서는 그를 때리려고 들었다고 한다. 그건 아마 어릴 때부터 보아 온 사위가 백년손님”이라기보다 자식처럼 가까웠고, 그만큼 기대가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감말랭이와 낮술

그의 본가는 3킬로미터쯤 떨어져 있고 그는 처가 땅에 계사와 집을 짓고 둥지를 틀었다. 대학생활 이후 교사시절까지 20년의 공백이 있다고는 해도 평생을 고향동네에서 고향친구와 살아가는 셈이다. 나처럼 변덕이 심한 사람은 도저히 따라가지 못할 긴 호흡이다. 그는 13년간 교직생활을 했다. 갈수록 학교는 삭막해졌고, 가르친다는 행위에서 의미를 찾을 수가 없어 그는 날로 피폐해졌다. 전교조활동도 했었던 것 같은데?

전교조활동을 했지만 그렇게 열심히 하지는 못했어요. 무엇보다도 문제를 놓고 토론이 앞서는 것이 체질에 안 맞았어요.”


그는 딱 한 줄을 말했을 뿐이지만 나는 단박에 알아 들었다. 내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삶을 규정하는 것이 사회구조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운동단체에서 스터디를 하기도 했지만 내게는 잘 맞지 않았다. 말이 너무 많고 화려하고 날카로웠다. 20대의 나는 세미나실을 떠나 농촌으로 떠났다. 활동할 곳이 이렇게 많은데 사방이 막힌 공간에 앉아 토론과 예단을 일삼는 것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저와 비슷한 점이 있네요.” 그가 느린 어조로 동감을 표하더니 소주를 내 온다. 안주는 직접 말린 감말랭이다.


낮술과 감말랭이는 나도 무척 좋아하는지라 돌연 분위기가 누그러진다. 게다가 순천의 지역소주 이름이 잎새주. 그의 해맑은 표정과 잘 어울리는 네이밍에 희희낙락하며 두 어 잔을 맛있게 받아 마신다. 술을 무척 즐긴다는 그, 사실 농사지으면서 술을 안 마시기는 어렵다. 새참으로 목을 축이느라고 마시고, 힘이 들어서도 마신다. 그도 맥주든 소주든 하루 두 병은 어김없이 마신다며, 귀농해서 제일 좋은 점이 음주라고 했다가 아내에게 크게 혼났다고 한다. 바쁜 일상을 비집고 들어온 불청객을 받아들여주는 것 같아서, 나는 그가 내 온 소주가 고마웠다. 그가 쓴 책 <나는 달걀배달하는 농부>를 보고 심취하여 한 번 찾아가겠노라고, 우선 내가 쓴 책 두 권을 보내 놓고도 한 달을 벼른 터였다.


그는 말이 아주 느렸다. 말수가 적기도 해서 나는 그의 말문을 여느라 내 경험을 마구 까발려야 했다. 그의 말을 들으러 온 자리이고, 오늘 안에 돌아가려면 시간이 많지가 않아 초조하던 참이었다. 그러다가 저와 비슷하네요.” 하며 들고 온 소주 한 잔에  초조함도 잊고 분위기에 젖는다. 말하자면 공자께서도 학문의 즐거움에 이어 인생의 버금가는 즐거움으로 친 장면이 아닌가. 유붕자원방래불역열호(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벗이 멀리서 찾아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부인은 일이 있어 외출하고, 집에는 실습을 나온 듯한 젊은 학생하고, 그의 글에 반한 뒤로 가끔 찾아와 농사일을 배운다는 김인아씨가 있었다. 그렇다. 그는 글을 아주 잘 쓴다. 나는 그의 수려하고 심지 곧은 글에 반해서 몇 가지 질문을 품고 먼 길을 왔다. 그 첫 번째 질문은 어떻게 그렇게 글을 잘 쓰세요?”였다.


글 쓰기가 힘들어요..... 귀농 초반에 일기 겸해서 쓸 때는 재미도 없지 않았는데 한겨레신문에서도 연재를 하라고 하고... 남에게 보이는 글은 부담이 되어서 이제 아주 힘드네요.... 그래도 잘 쓴다고 하니까 좋을 때도 있고.....”


띄엄띄엄 그가 한 말이다. 만난 지 한 시간, 나는 아직 그의 명징한 글발과  느릿한 말투가 매치가 되지 않는다. 솔직히 갑갑할 정도이다. 내가 사는 수원에서 순천까지 기차노선이 있는 것은 좋았는데 올라가는 기차가 오후 5시 반이 막차라 그다지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순천까지는 잘 왔는데 역에서 그의 집이 있는 외서면 농소리까지 가는 버스 배차가 80! 망설이다 택시를 타고 들어왔다. 이야기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나간다치면 한 시간 반 밖에  시간이 안 나서  택시를 기다리라고 한 참이었다. 그리하여 내게 주어진 시간은 두 시간 반, 서둘러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간다. 아니에요. 선생님 글 굉장히 잘 쓰시는 거예요. 제가 글쓰기선생이라 보는 눈이 있거든요. 그렇게 탁월한 재능은 키워주어야 할 것 같은데요, 하면서.


제가 선생님 글을 읽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생각이 깊은지 감탄했거든요. 시선이 촘촘하고 무엇 하나도 예사로 넘기는 것이 없으니까 참새처럼 흔한 소재를 갖고도 멋진 글이 탄생하더라구요.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반듯하고 생각이 깊었는지요?”

저는.... 뭐 그렇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요. 얼마 전에 이상한 말을 들었어요. 누님이 하는 말이 생전에 어머니께서 저를 어려워했다는 거지요. 어려서부터 별 말이 없고, 시키는 일은 또 깔끔하게 해 놓고 그러니까.... 물론 저는 못 느꼈지만요.”




신의 손

그는 말을 아꼈지만 그의 느린 말씨가 생각을 깊어지게 하는 일등 요인은 아닐까. 머리에 떠오르는대로 토해놓는 속도감이 환영받는 세태지만 재치말빨이라는 이름으로 생각을 다 토해버리면 언제 숙성되느냔 말이다. ‘이란 장소와 시간과 대상에 예속되지 않는 표현행위라는 점에서 보다 수 십 배 수 백 배의 효능을 가질 수도 있다. 2년 전에 출간된 책을 읽고 순천까지 내려 온 나 같은 독자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나는 이미 말에 비할 수 없이 섬세하고 기품있는 그의 생각을 익히 접한 터라 서서히 그의 화법에 적응이 되어 간다. 뿐만 아니라 글쓰기와 농사가 닮았다는 것을 떠올리고 경이로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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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순천광장신문


한없이 느리고 공을 들여야 한다는 것, 그렇게 탄생한 한 편의 글(한 줌의 곡식)이 우리의 몸과 영혼을 키워준다는 점에서 글쓰기와 농사는 신통하게 닮았다. 그는 책에 농사꾼이 신의 일을 대행하는 존재라고 썼다. 농작물을 정성과 사랑으로 보살핌으로써 그 결과물로 자신과 가족과 이웃을 보살피는 농사꾼은 필연적으로 평화를 사랑하고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을 북돋아 주게 되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하트마 간디가 했다는 이 말을 떡 하니 인용해 놓은 것에 나는 감복해버렸다.


신이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는 존재라면 농부는 신의 손이다


자신의 직업에 이만한 자부심을 가진 농사꾼이 나는 못내 고마웠다. 예능과 SNS가 범람하면서 너무 얄팍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점령한 듯한 세태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전세계에서 몰려든 식재료는 정체를 알 수 없었고, 개중에는 유전자조작식품으로 만든 식용유나 밀가루나 두부 등속도 넘칠 것이 분명했다. 요즘은 무얼 먹어도 예전에 먹던 음식 맛이 나질 않아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이 심란함이 개인의 일에 그치면 괜찮은데 조금 물러나서 보면 사태는 심각한 수준이다. “2014년 우리 나라의 식량자급율은 23%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쌀 자급율 80%를 제외하면 나머지 식량의 자급율은 5%에 불과하다. 자유무역체제라곤 해도 어떤 변수가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는 일. 농산물 가격이 갑자기 오르면 국가경제가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돈이 있어도 식량을 구하지 못하는 그런 시대가....” (김성훈, “워낭소리 인생삼모작의 이야기참고)


여기에 점입가경인 정치판이나 갈수록 팍팍해지는 서민의 살림이며, 조금만 건드리면 폭발해 주겠다는 듯 불안과 분노가 증폭되는 사회에 IS 정국까지 겹쳐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 나의 잠정적인 결론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 소농이었다. 그렇다고 나 혼자 산골에 숨어 살자는 것이 아니니 비슷한 뜻을 가진 사람들과 공부하고, 활동도 하는 지역사회를 꿈꿔 왔는데 내 레이더에 그가 걸린 것이다. 소농이 답이라는 생각을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내게는 넘지 못할 벽이 있었으니, 농사일로 먹고 산다는 것이 아득하기만 하다는 사실이다. 이런 내게 귀농한 지 15년이 흐르긴 했어도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을 나온 먹물 출신으로 농사꾼보다 더 농사꾼같은 포스를 지니게 된 그가 존경스러울 밖에. 자연히 질문은 세 번째로 넘어 간다. “어떻게 그렇게 일을 잘 하세요?”


"어려서부터 일을 잘 했어요. 또래보다 힘이 좋고 일을 빨리 배우니까 아버지께서 초등학교 고학년 때 동네 목수에게 부탁해서 내 지게를 맞춰주셨을 정도지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소 먹일 꼴을 한 짐씩 베어다 놓았는데,  내가 베어다 준 풀을 소가 먹는 모습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


그의 말을 들으니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어린시절의 단서에서 찾아야 할 모양이다.  중학교 때까지 부모님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자연에 대한 추억이 얼마든지 있다. 보름달이 훤한 밤, 달빛을 받아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한지에 잎을 떨군 감나무의 그림자가 비치고, 외양간의 소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뒤안의 대나무잎들은 서로 부벼대며 바스락거리고, 뒷산에서는 부엉이가 울 때, 소년은 아득하게 우주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봄날이면 동네 어귀의  묏등에 기대앉아 파랗게 자라기 시작한 보리밭 위로 종달새들이 종알거리며 자맥질을 반복하는 것을 한없이 바라보곤 했다. 그 밤의 신비와, 그 봄날의 평화는 그의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도시의 황량함에 지쳤을 때 그토록 그의 몸이 농사를 원했을 것이다.  


나도 비슷한 장면을 몇 가지 품고 있다. 부모님은 이농세대였지만 외가가 가까워서 방학 때마다 외가에 가서 살다시피 했던 것이다. 신도시로 편입되어 아파트단지가 된지 30년이 넘은 외가를 지금도 가끔 떠올려 볼 정도로 나는 외가를 좋아했다. 반질반질하게 다져진 둥근 안마당을 감싸고 있는 미음자 구조, 안방 창문을 열면 햇살 환한 장독대와 그 앞에 심겨진 백일홍이나 분꽃이 보이고, 소여물을 쑤는 부뚜막과 연결된 작은 방에서는 매캐한 곰팡내가 났다. 사랑방은 조그만 정사각형이었고, 커다란 빗장이 달린 광은 무슨 비밀이라도 품고 있는 양 음습했다. 정월에 술을 담그느라 술밥을 지어서 널어 놓는데 이 밥이 꼬들거려서 아주 맛있었다. 오며가며 슬쩍 집어서는 꽁꽁 뭉쳐 먹으면 떡이나 진배없었으니 아마 찹쌀밥이었나 보다.


엿을 고는 날은 잔칫날이었다. 엿물을 고느라 종일 불을 때서 방바닥이 딛지도 못할 정도로 설설 끓는다. 드디어 준비가 다 되었나보다. 끓는 엿물을 멧방석 위에 동그랗게 부어 굳히는 것을 마술 구경하듯 둘러앉아 구경하던 아이들. 어린 시절 각인된 자연친화적인 성품은 내게도 뿌리를 내렸다. 나 역시 언제고 농촌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하지만 유독 게으른 내가 농사일이 막막하다면 그에게는 상대적으로 두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계수 씨 같은 큰농부의 그늘에서 일을 도와주고 이삭을 얻어 먹는 구상을 하고 있던 차인데 그는, 내 손으로 계획하고 주도해야 농사일이 재미있다고 한다.




어떤 일이라도 재미가 없으면 가짜

그러면서 놀라운 말도 잇는다. 이제껏 한 번도 일이 싫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농사일이 힘든 적은 있어도 권태를 느낀 적은 한 번도 없다니 그 또한 기질이라면 기질이고 운명이라면 운명이리라. 자연친화적인 기질이 비슷한 사람이라 해도 나처럼 직접 농사를 짓는 것에 엄두를 못 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가 농사일을 하면서 한없는 재미와 자부심까지 생산해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성장기에 농사일을 해 봤다는 것이 절대적인 변수가 될 것 같진 않다. 어릴 때 농사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경험했기에 남들보다 더 멀리 떨어지고 싶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에 빠져든 것이 우연인지 운명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그 일을 찾았느냐 못 찾았느냐 하는 것이고, 그 속에서 얼마나 자족하며 일상을 향유하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그는 어떤 일이라도 재미가 없으면 가짜라고 단언한다.


어떤 일이라도 재미가 없으면 가짜! 나는 과묵한 그의 입에서 나온 과격한 말에 탄성을 지른다. 이 분이 조용해 보여도 말문이 터지면 굉장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집에서는 김장용 배추를 절여서 판매하는지라 김장철이 그 중 바쁘다. 작년에 배추 절이는 것을 도와주러 오신 누님이 아직도 농사일 하고 사는 게 좋으냐고 묻더란다. 며칠간 가까이에서 보기에도 너무 일이 많아보여 골병이라도 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고, 공부 잘 한 동생의 선택에 대한 아쉬움이 여전히 느껴지는 질문이다. 그는 갈수록 더 좋아져요하고 대답했다. 귀농한 지 15년이 된 지금, 그는 자신이 농사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몸이었음을 새록새록 느끼곤 한다. 소띠 해 봄날 아침에 태어난 자신의 사주가 감격스러울 정도이다. 몸의 정직함을 믿는 그는 귀농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머리로 인지하는 사회경제적인 의미보다 자신의 몸이 농사일을 즐겁게 받아들이는지를 먼저 확인해 보자고 권한다.

 

일전에 어디선가 읽은 귀농 사례가 떠올랐다. 도시에서 광고 일을 하던 그이는 제주로 귀농한 뒤 전직을 살려 야무진 홍보를 했다. 자신이 키우는 귤나무 하나하나마다 도시의 소비자를 연결시켜 펀드를 받은 것이다. 이제 공들여 귤만 키우면 되었다. 하지만 그 해 날씨가 좋지않아 그는 예상한 만큼 귤을 생산해내지 못했고, 이미 받은 펀드를 갚아주느라 빚을 지고 말았다는 이야기. 그 외에도 도시인들이 생각하는 귀농은 낭만적인 착오로 범벅이 되기 쉽다. 농지를 구하기도 전에 마음에 드는 집터를 발견하고 덜컥 집부터 짓는다든지, 농작물에 그늘이 질 정도로 밭 주변에 관상수를 심어 놓는다든지...


이런 예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귀농은 성공적이었다. 학교에 사표를 낸 뒤 한 해 가을 혼자 내려와 농사를 체험했고, 가족과 함께 내려온 첫해에 부모님이 짓던 논밭 1500평에 벼와 고추, 감자 등을 심어 500만원의 수입을 올렸는데 다들 귀농 첫해의 결실로는 획기적이라고 했다. 가까운 낙안에 빌라를 얻어 7년이나 출퇴근을 하며 농사를 짓다가 집을 지었으니 그의 은근과 끈기는 알아주어야 할 것이다. 타지에 가서 축사를 지으려면 냄새때문에 반대에 부딪혀 고생을 많이 한다는데 이것도 고향으로 내려온 덕분에 무사통과가 되었다. 생산력은 딸리면서 홍보와 판로개척에 열을 올리는 것이 일반적인 귀농인의 사고방식이라면, 그는 뼛속까지 농사꾼인 셈이다.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 온 동네사람들보다 농약을 덜 치다보니 결과로 보여주어야 할 필요도 있었겠고 어쨌든 그는 명실상부한 농사꾼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그리고 살아남는 것에 그치지않고 사유와 노동과 자립과 신명이 어우러진 하나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도 인생을 고뇌나 숙제가 아니라 한바탕 놀아볼 무대라고 생각하므로 그의 생각에 격하게 공감한다. 나처럼 생각뿐이지 균형잡힌 세계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어주어서 그가 새삼 고맙다. 농사일의 재미에 대해서는 그가 순창광장신문에 쓴 글을 빌려오자. 천생 농부가 쓰는 글이라 그런지 그의 글은 농산물처럼 질박하면서도 풍요롭다.  (그는 지역민들이 협동조합으로 설립한 순천광장신문의 비상근 이사장이다. )


대나무는 생각할수록 특이한 식물이다. 녀석은 평생 자라야 할 크기를 첫 해 봄에 다 커버린다. 해가 지나면서는 살이 두터워지고 단단해질 뿐이다. 빽빽한 대나무 숲에서 남들보다 높이 자라지 못하면 햇빛을 받지 못해 죽어야 하기 때문인 것 같다. 대나무의 줄기는 마디와 매듭의 연속이고 그 끝은 이 둘의 무한정한 연속의 가능성으로 보인다. 매듭을 목표로, 마디를 과정으로 본다면 무엇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우리네 삶도 그런 것이 아닐까. 삶을 이러한 눈으로 본다면 농사일만큼 그에 걸맞은 일도 흔치 않을 것 같다. 농사일은 씨 뿌리는 봄부터 거둬들이는 가을까지 모든 순간이 생동감으로 가득하다. 가을의 결실이 봄에 씨를 뿌리는 일의 목표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감사의 대상일 뿐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땀 흘려 가꾸는 일의 의미와 진실을 뒤엎지는 않는다. 내게 농사일이 점점 더 좋아지는 이유다.




하늘에 순응하는 삶을 위하여


그는 요즘 양계와 논밭 5000평의 농사를 짓고 있다. 1000수 정도를 키우며 순천과 벌교의 250가정에 일주일에 세 번 배달을 나간다. 양계를 시작한 초기에는 병아리를 받으러 갈 때 목욕재계하고 갔는데, 14년쯤 배달을 해 오니 조금 싫증이 날 때가 있다고 한다. 달걀꾸러미를 들고 200~300가정에 일주일에 한번씩 배달을 하는데 14년을 했으면 싫증이 나는 게 당연하지...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에 취약한 내게는 그저 대단하게만 보이기에, 교직생활도 13년간 했던 것을 보면 선생님은 13년이 한계인가 보다고 슬쩍 감탄을 농으로 바꿔 건넨다. 7년마다 우리 몸의 세포가 완전히 바뀐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으니 보통사람의  한계는 7년이기가 쉬운데 선생님은 보통 사람의 두 배를 버틴다는 덕담도 덧붙였다. 13년설이 재미있었는지 그가 소리내어 웃는다. 나도 덩달아 웃다가, 내년에 아이들이 학업을 마치면 양계를 그만 두고 싶다는 말에 멈칫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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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출처:순천광장신문

무릇 농사꾼이라면 논밭을 일구어야 하는데 수입의 3분의 2를 양계가 차지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고, 닭 사료의 70%를 수입사료에 의지하는 것이 싫다고 한다. 자연에 살고 싶지만 일이 겁나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양계가 절충안이 될 것 같고, 무엇보다도 지금 회전되고 있는 수익구조를 엎는다는 것에 내가 크게 놀란다.


하지만 선생님. 도시의 소비자에게는 달걀이나 채소나 같은 농산물이거든요. 더구나 달걀은 동태와 더불어, 아니 동태보다도 훨씬 가까이 있으면서 서민의 단백질을 보충해주는 일등공신이구요. 전에 어느 기사에서 보니 성분의 80% 이상이 수분인 채소를 경작하기 위해 화석연료를 쓰는 것이 타당한가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던데 그런 것을 보면 농사에도 문제점이 없는 건 아니고, 상대적으로 양계는 꼭 필요한 것 같은데요. 저처럼 일 못하는 사람이 귀농을 한다면 일 거들기에도 좋고, 최소의 현금을 확보할 기회도 되구요.”


서운한 마음에 조금 길게 내 생각을 피력했더니, 그럼 양계 없애기 전에 내려오면 되겠다는 농으로 피해간다. 그는 귀농을 준비하던 시기에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야마기시마을에서 처음 양계에 접했다. 야마기시공동체는 일본에서 2차대전을 겪으면서 그 정신적 물질적 황폐함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으로 비롯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1984년에 설립되었으며 5만 평의 부지에 50명 정도가 모여 완전한 무소유의 공동체활동을 하고 있다.


주된 생산물은 유정란과 채소인데 모두 친환경적으로 생산해 최고의 품질로 도시의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한다. 마을 구성원들도 모두 잘 웃고 지적으로 보여서 단단한 저력을 느낄 수 있어, 마을 입구에 쓰여있는 돈이 필요 없는 살기 좋은 즐거운 마을이라는 구호가 조금도 허황되게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닭을 4만 수나 기르고 있었는데 10여 평 공간에 100마리씩 넣는다. 그 중에 다섯 마리는 수탉이다. 사료는 약품을 넣지 않은 것으로 주문해서 쓰며 저희들 똥을 주어 기른 풀을 충분히 먹는다고 한다. 야마기시마을에서 그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오직 사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일반 양계장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생명이 자라는 데 필요한 모든 조건 즉 땅, , 영양, 친구 등을 빠짐없이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닭장 바닥에는 똥과 왕겨가 두껍게 덮여 있었지만 신기할 정도로 냄새가 없었고 닭들이 사람을 겁내지 않고 다가오며, 점잖은 것이 기품까지 있어 보였다. 그는 귀농하면 양계를 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마침 순천 인근에는 유정란을 생산하는 곳이 별로 없어서 그는 양계로 수월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도 야마기시농법을 응용하여 70%의 사료에 질경이나 씀바귀같은 풀을 섞어서 닭에게 준다. 흔하디 흔한 것이라 천하게까지 느껴지는 질경이가 쓰일 곳이 있다는 것이 고마워 나는 벙싯거리며 웃는다. 양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키워서 나같은 얼치기 귀농인 몇이 머물 수 있는 곳을 만들면 어떨까? 이제 은퇴세대가 쏟아져나올 것이고 그 중에는 1인세대도 적지않을 것인데, 야마기시마을처럼 대규모가 아니라 마을 곳곳에 소규모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대한 구상을 조심스럽게 건네니, 자연이나 가족처럼 당연한 것 외에 인위적인 공동체에는 관심이 없다고 한다. 나는 그의 말이 조금 서운하다. 닭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너무 어렵지않게 땅과 빛과 친구와 영양을 갖출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기는 귀농인이라면 다들 우선시할 것 같은 직거래도 그는 좋아하지 않는다. 내 농산물을 일정한 틀에 맞추는 것이 싫어 정부의 유기농 인증을 회피하다가 요즘에야 조금씩 받기 시작했을 정도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얼굴을 모르는 원거리가 아니라, 순천 정도의 규모에서 서로 살려주는 그런 직접적인 소통의 장을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도농공동체에 진전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의외로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달걀공급이 끊기면 그대로 관계가 끊어지더라는 것이다. 그의 꿈에 백프로 공감하는 만큼 이 부분은 내게도 아주 아쉬운 일이었다. 모르긴해도 농사일에 바쁘고 또 기질상 그가 먼저 나서서 행사를 기획하고 기회를 만드는 일이 적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어느덧 시간이 되어 길을 나서는데 마을 복판에 선 느티나무가 소담하다. 일곱가구가 사는 마을이라니 이 번잡한 세상에서 꿈만 같다. 도로에서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올라오던 소롯길은 그의 계사에서 정점을 찍고 다시 조금 내려간 곳에 아늑하게 그의 집을 품어 주고 있다. 근처에 주암호가 있어 물안개가 자주 끼고, 멀리 석양이 보인다는 그의 집이 나는 좋았다. 이웃이 되어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며 서로 살려주는 관계가 되는 것은 쉽지않겠지만 가끔  그가 좋아하는 술을 사들고  내려가 일손을 거들며 배우며 지내는 것은 할 수 있으리라.


다시 택시를 타고 나오는 길은 정겨웠다. 꽃이 피면 환상적이겠다 싶은 벚나무길을 붉은 야산이 감싸고 있다. 간간히 빨간 동백이 뚝뚝 떨어지고 있고, 나무에 남겨둔 까치밥은 보기만 해도 몰캉거리는 촉감이 느껴질 듯 했다. 드디어 기차역이다. 순천(順天)! 하늘에 순응하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땅! 이보다 더 농부 김계수에게 어울리는 땅은 없으리라. 천방지축 겁 없이 저지르며 살아 온 나도 이제부터는, 순할 순()- “순하다, 좇다, 도리를 따르다, 거스르지 않다, 잇다”- 이라는 글자를 단단히 끌어안고 살리라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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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3 12:19:31 *.230.103.185

김계수씨가 지은 <나는 달걀배달하는 농부>라는 책을 읽고 감복하여

전북 순천 그의 집에 다녀왔습니다.

조금 길지만 그냥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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