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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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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1일 13시 32분 등록

헤르만 헤세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코(San Francesco d' Assisi)를 사랑했습니다. 두 사람은 내 마음 속의 별이기에 그들이 프란치스코 성인을 사랑한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카잔차키스가 쓴 <성자 프란체스코>와 <영혼의 자서전>, 그리고 헤세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살펴보면서 나름대로 그 이유를 찾아봤습니다.


먼저 헤세와 카잔차키스는 성 프란치스코가 ‘위대한 시인’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카잔차키스는 “왜 성 프란체스코를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프란치스코 성인은 르네상스 이전의 가장 위대한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신의 가장 하찮은 피조물들에게까지도 그는 허리를 굽혀 귀를 기울이고는 그들이 지닌 불멸성을 노래로 들었다”고 답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성 프란치스코는 가장 낮은 것부터 가장 높은 것까지 품을 수 있는 감수성과 의식 수준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헤세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 자체가 아름답고 고귀한 시라고 강조하면서 이렇게 찬탄합니다.


“그의 기도나 노래 한 편만이 겨우 남아 있을 뿐이지만, 그는 우리에게 산문과 시 대신에 자신의 소박하고 순수한 삶의 추억을 남겼다. 그 삶은 수많은 시 작품들을 넘어선 아름다움과 말 없는 고귀함으로 높이 서 있다. (...)


아, 어여쁜 작품들을 완성한 유명한 작가와 시인들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하늘의 천사가 씨앗을 뿌리듯 민중에게 근원적인 힘과 가슴속에서 불타오르는 말과 영원에 대한 생각과 태곳적 인류의 그리움을 뿌리는 사람은 드물다.”


두 사람이 프란치스코 성자를 존경한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새로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헤세와 카잔차키스는 그에게서 새로운 시대를 예감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새 시대를 여는 새로운 정신과 삶의 길을 생생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헤세는 “그는 우리가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정신과 예술이 새로이 탄생하던 그 시대라는 거대한 작품을 지어낸 수수께끼같이 위대한 첫 사람들 중의 하나로 꼽힌다”고 말합니다. 또 카잔차키스는 “중세의 불화가 파헤친 겨울에서 처음으로 솟아 나온 지고(至高)한 꽃이 프란체스코였다. 그의 마음은 소박하고 행복하고 순결했으며, 눈은 아이들이나 위대한 시인들처럼 항상 새롭게 세상을 보았다”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프란체스코는 세상을 항상 새로운 눈으로 보는 첫 사람이었다. 중세의 무겁고 부자유스러운 학문의 갑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육체와 영혼은 발가벗은 채로 봄의 모든 떨림을 전해주었다.”


두 사람은 왜 성 프란치스코를 ‘르네상스 시대의 문을 연 첫 사람’,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는 첫 사람’이라 생각한 걸까요?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프란치스코 성인은 기존의 종교 해석에 갇히지 않고 성서를 새롭고 참신하게 해석했습니다. 특정층만 사용하는 라틴어가 아닌 토착어로 설교했으며, 교회뿐만 아니라 시장과 길거리에서도 설교했습니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당연시한 권위와 특권에서 탈피해 자발적 희생과 맑은 가난(淸貧)을 강조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걸음걸이가 곧 우리의 설교가 되지 않고서는, 설교하러 멀리까지 돌아다녀도 소용이 없다”는 자신의 말대로 살기 위해 온힘을 다했습니다.


헤세가 말했듯이 성 프란치스코는 두 손 가득히 좋은 씨앗을 움켜쥐고서 온 땅에 뿌렸고, 씨앗들은 곳곳에서 화가와 시인과 현자의 영혼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나고 꽃을 피웠습니다. 카잔차키스와 헤세의 영혼에도 씨앗이 묻혔고 움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성자 프란체스코>가 그 결실입니다만 이게 다는 아닙니다. 헤세의 여러 작품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은 때로는 크눌프의 모습으로, 또 때로는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말과 행동으로, 다른 소설에서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가면을 쓰고 등장합니다. 마흔 살의 카잔차키스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 고뇌할 때 성 프란치스코는 ‘희생과 사랑의 숭고한 길잡이’가 되어주었고, “인간이란 선택한 길의 한계점까지 도달한 능력과 의무가 있음”을 그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사람의 인연은 신비한 면이 있습니다. 시간(時間)과 공간(空間), 그리고 인간(人間)이라는 단어에는 ‘사이 간(間)’자가 들어갑니다. 이 ‘사이’에서 묘한 일이 벌어지고 인연이 신기하게 펼쳐지곤 합니다. 헤세와 카잔차키스는 20세기를 함께 살며 유럽에서 오랜 동안 활동했음에도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던 듯합니다. 그런데 13세기 초반의 인물인 성 프란치스코를 중심으로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은 교차하며 얽힙니다. 헤세와 카잔차키스는 내 마음 속 영웅입니다. 두 사람이 내 안에서 어떻게 만나고,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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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시 성인의 이름은 책에 따라 ‘프란치스코’, ‘프란체스코’, ‘프란치스꼬’ 등으로 조금씩 다릅니다. 위 글에서는 책 제목과 인용문에 나오는 성인의 이름은 해당 책을 따르고, 그 밖의 경우에는 헤르만 헤세의 책을 따라 ‘프란치스코’로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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