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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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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5일 02시 03분 등록

봄이다. 봄은 겨울 족쇄에 차있던 여성의 옷을 해방시키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다. 덜컹거리는 전철. 건너편 좌석 한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있다. 연분홍 치마에 스타킹, 분홍신 구두와 화사한 빛깔의 채색. 그녀의 피부는 60대 현재 나이를 말해 주지만 그 외부의 패션은 젊은 사람 못지않다. 조숙하고 단정한 차림새로 양발도 가지런히 소녀처럼 포갠다. 여인은 자리가 불편한지 연신 스커트를 풀럭거렸다. 그럴 때마다 살포시 드러나는 하얀 무릎의 속살. 보고 있자니 괜히 겸연쩍은 마음에 고개를 돌린다. 웃긴다. 그런 연배의 여인 행위를 보고도 자못 가슴이 두근거려지다니. 그래서 남자는 애나 어른이나 다 똑같다고 하는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차려입은 외양이 나의 반응을 유발하는 중요한 인자로 작용 했으리라.

 

결혼한 지 강산이 훌쩍 넘어감에도 나의 행색을 두고 마눌 님의 잔소리는 끝이 없다. 왜 떨어진 양말을 신느냐, 해어진 바지를 아직 입고 다니느냐, 새로 사놓은 와이셔츠는 언제 입을 건지. 그렇다. 나는 이십년 가까이 된 옷을 입기도 흘러내려 애써 올려야하는 양말을 신기도 한다. 회사 직급에 어울리는 복장을 하라고 함에도 나는 오래된 것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그렇다고 알뜰살뜰 구두쇠 행세를 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성을 간직하고픔인지 아니면 그 시절 향수를 기억하고픈 욕구인지. 까닭이 있다면 아마도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 일 것이다. 그랬다. 전쟁과 보릿고개세대를 경함한 우리의 어머니들이 그러했듯, 그녀도 생업에서 귀가한 늦은 밤에도 손을 놓지 못하였다. 피곤함과 저물어가는 눈꺼풀을 애써 참아내며, 설거지를 끝내고 바느질을 이어간다. 하얀색, 검은색 알록달록 여러 가닥의 실패와 바늘들. 그리고 호출. 바늘귀에 실을 꿰는 것은 나의 몫이다. 초롱초롱한 시력의 가장 앳된 나이(?) 이었기에. 실에다 침을 묻힌다. 한 번에 성공. 그럴 때마다 용돈을 받았다. 억센 손으로 구멍 난 양말을 기우고, 나이테의 주름살만큼 벌어진 사리마다 - 팬티를 어르신 분들은 이렇게 호칭 하였다 - 의 검정 고무줄을 연결한다. 나는 오랫동안 여자의 팬티 모두가 그렇게 펑퍼짐한 줄 알았다.

 

명절. 제사를 앞두고 해묵은 청소를 하노라면 장롱 깊숙 겹겹이 누워진 옷들이 쌓여있다. 예전 옷들은 어찌 이리 무게가 있는지. 변함이 없다. 헐거워진 내복과 세월의 인고만큼 빛바랜 양장들. 제발 좀 버리자고 푸념을 하면 그녀의 대답. 이것이 얼마짜리인지 아니. 보다 못한 나는 마트로 향한다. 최신상품 내복을 기웃거렸다. 언제였던가. 이렇게 선물을 해드린 전적이. 가물가물하다. 대학교 시절. 노가다를 해보고 싶었다. 모두들 만류를 한다. 연약한 내 몸매에 병원비만 문다고. 호기 있게 도전 하였지만 이틀을 하고 그만두었다. 정말 약값이 더들어갈 것 같았다. 노동의 대가로 일만 사천 원의 임금을 손에 쥐었다. 뭘 하지. 뙤약볕 삭신의 쑤심으로 처음 받은 돈이 수중에 들어오자 그녀가 생각났다. 꿀 한 병을 구입해 건넨다. 머리만 커진 아들이 이제야 철이 들었구나 라는 기쁨이었는지, 얼굴에 환한 보름달이 가득하다. 그때의 느낌. 생각이 났다. 나름 제일 따뜻해 보이는 내복을 드리자, 그녀는 그때 그 표정으로 한겨울 내내 입고 다닌다. 못난 막내아들이 얼마 만에 드리는 선물이어서 그랬을까. 마땅히 입을게 없어서 그랬을까. 그러고 보니 그 외엔 변변한 선물을 사드린 기억이 없다. 뒤늦게 철지난 사진첩속의 그녀를 되살렸다. 지금의 여인들처럼 청순하다. 당시 유행했을법한 하얀 블라우스 옷에 잡티 없는 피부. 가슴 설렌 많은 꿈들을 꾸었겠지. 백마 탄 왕자를 바라지는 않았더라도, 밥 굶지 않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기원 하였을 터이고. 아마도 평생 이처럼 고단한 날들을 살게 될지는 몰랐을 터이다.

 

누구처럼 화려함의 옷으로 변신하고

누구처럼 남편 손에 이끌려 백화점 신상품의 쇼핑을 다니고

누구처럼 자식새끼 사준 옷을 입고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중년의 나이. 여름날 하루. 친구와 동행하던 중 먹음직스러운 수박들이 길거리에 가지런히 목을 내민다.

“들리는 길에 어머니한테 수박 한 통 사다 드리자. 내가 살께.”

통통 두드리며 잘생긴 놈을 골라 계산을 하고 가슴에 안았다. 묵직하다.

“우리 엄마한테도 사다 드리지 않았던 수박인데…….”

그가 대답한다.

“안 계시니까 못 드리지.”

아니다. 그건 아니다. 나는 그렇질 못하였다.

 

여러 상념속 시간은 흘러 이제는 그녀가 아닌 또 다른 여인이 내 앞에 서있다. 그에게 말을 건넨다.

“양말이 빵구 났는데”

“요새 세상에 그렇게 신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궁상맞게 살지 좀 말아요.”

핀잔에 물끄러미 생채기 난 양말을 쳐다보노라니 생전 그녀의 얼굴이 그곳에 있다. 그랬다. 그녀는 그렇게 살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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