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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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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3일 13시 26분 등록

레전드급의 작가 황석영의 신간 <해질 무렵>을 읽었다. 얇은 책이 한 손에 쏙 들어오고, 문장은 지극히 담담하다. 감정표출이나 내면탐구라고 부를 만큼 자세하게 묘사한 부분은 한 군데도 없다. 그런데 담담한 문장 한 줄이 숱한 생각을 불러오고,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든다면 이것이 바로 내공일까.

 

이 책은, 성장기에 풋사랑을 나누었으나 남자는 성공적으로 산동네에서 빠져나와 출세했고, 여자는 여전히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60대의 이야기를 축으로 하고, 그 배경에 아들세대의 모습을 깔아 두었다. 그러니 40여 년에 걸쳐 산동네와 도시를 망라하는데 당최 군더더기가 없다. 골자와 속도를 선호하는 나는 그의 화법이 마음에 든다.

 

온 세상의 고향이 다 사라졌어요.”

그거 다 느이들이 밀어버렸잖아.”

 

주인공남자는 건축가다. “토건 대한민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전통문화를 불도저로 밀어붙이며 빠르게 성장해 온 우리를 상징하는 직업이다. 그는 성공했으나 외로운 처지이다. 결혼생활이 삐거덕거리자 아내는 딸이 있는 미국으로 가 버렸고, 돌아 올 것 같지 않다. 이 설정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피해갈 수 없는 귀결을 전제한 것 같기도 하다. 동료의 죽음이나 회사에 대한 정부의 압력도 그 설정을 돕는다.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려가면서 마치 다른 세계의 터널을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은 꿈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욕망의 꿈이 이어지다가 현실인 것처럼 실체가 나타나고 그것마저 꿈이 되어 흘러가버린다. 저 벌판에 띄엄띄엄 서 있던 시멘트와 철골로 이루어진 건물들은 예전과 달리 게임기 속의 가상세계 같다.

 

종종 허탈해지는 남자 박민우에게 산동네의 첫사랑 차순아가 연락을 해 온다. 실은 차순아가 직접 연락한 것이 아니라 차순아의 아들 김민우의 여자사람 친구였던 정우희가 보낸 메일이다. 대형마트에 다니는 차순아의 아들은 철거용역반을 전전하다 사이트에서 만난 사람들과 동반자살을 하고, 정우희는 연극판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며 밤잠도 못 자고 편의점 알바를 하며 겨우 연명하는 처지이다.

 

그애가 우리처럼 어렵고 가난해도 행복했으면 했지요. 그런데 우리가 뭘 잘못한 걸까요. 왜 우리 애들을 이렇게 만든 걸까요.

 

차순아의 토로처럼 부모세대에서 자녀세대로 이어지는 흐름은 결코 낙관적이지가 않다. 구두닦이 나와바리를 놓고 패싸움을 벌여도 산동네에는 생생한 삶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든 것이 가상현실처럼 느껴지는 부모세대는 그렇다고 쳐도, 비정규직과 열정노동과 동반자살이 뒤범벅된 현재에는 희망이 없다.

 

걸어 온 길이 흔적도 없이 지워진 것을 보면 지금 내가 만지고 겪는 일도 머지않아 그리 될 것을 아는 데서 오는 공허함, 딱히 어쩌지는 못하지만 우리 이대로 좋을까 하는 세태에 대한 안타까움.... 모든 면에서 작가와 동일하게 느끼므로 짐짓 침울해지려는 순간 눈을 반짝 뜬다.


그가 작업했던 지방 두메산골 작은 군읍의 프로젝트가 영상에 흐른다. 그는 시골집 툇마루에서 노파의 손을 잡고 있다. 뭘 지을라구 그려? 면사무소요. 그딴 거 짓지 말어. 우리네하군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게. 그럼 뭘 지으면 좋겠어요? 목욕탕이나 하나 지어주지그려. 하루죙일 들에 나가 비지땀 흘리고 나먼 여자들은 목물할 데두 읎고 노인네들 삭신이 저려도 어디 푹 담그고 쉴 데가 읎다니께. . 곡 지어드릴게요. 믿어두 돼? 암요, 꼭이요. 서로 잡은 대조적인 손이 영상에 가득차 있다. 연필만 잡던 건축가의 가녀리고 긴 손과 마른 삭정이처럼 구부러진 노파의 손이 서로 잡고 있다.

 

? 나 이 건축가 아는데.... 싶다. 무주에서 십 년이나 공공건축을 실험한 정기용이다. 노파의 염원을 마음에 새겨 면사무소 1층에 목욕탕을 넣고, 공설운동장과 군청을 지었다. 그 모든 것에 건축가의 오만이나 과시가 아니라 지역사람의 필요와 자연과의 합일이 우선되었다. 기적의 도서관 설립이나 문화연대에도 앞장섬으로써, 나 같은 문외한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2011년에 별세했다(66). 무심히 책을 읽다가 실제 사례, 그것도 흠모하던 사례가 나와서 와락 반가운데 황석영도 말미에 정기용 형의 일화임을 밝히고 있다.

 

연극판에서 메말라가던 정우희는 차순아의 이름으로 박민우에게 편지를 쓰는 순간에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의 손을 잡고 지하방을 빠져나가는 꿈을 꾸기도 했다. 부디 그리 되기를 기도한다.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이 비빌 둔덕이 되고, 그렇게 살고 싶다는 역할모델이 되는 사회에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면 박민우는 개인의 안위를 위해 훠이훠이 달려왔지만 쭉정이 같은 현실에 부딪히는 인물이고, 정기용은 죽어서도 희망을 주는 인물이라고 하겠다. 그는 정기용을 응원한다는 이름으로 동료들이 준비한 전시회가 개막되기 닷새 전에 운명했다. 이 책 속에서는 죽기 전에 바람 쐬자며 동료들과 소풍나간 강화도에서도 의연하고 낙천적인 모습이다. 정기용전집 5권이 나와 있으며, 그의 마지막 1년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영화 <말하는 건축가>도 있다. 그가 설계한 기적의 도서관은 또 얼마나 오랫동안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이 되어줄 것인가. 좋은 삶이 있었기에 좋은 죽음이 되었다. 작가가 의도했든 안했든 이런저런 생각으로 번져갈 수 있어서 좋은 책이었다.

 

 

건축이란 기억을 부수는 게 아니라 그 기억을 밑그림으로 사람들의 삶을 섬세하게 재조직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 같은 꿈을 이루어내는 일에 이미 많이 실패해버렸습니다. - 정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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