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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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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20일 20시 58분 등록


양 팔에 문신을 가득 한 친구가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다. 앞치마를 두른 것으로 보아 책정리라도 하나보다. 서 너 살부터 열 댓 살까지 되어 보이는 아이들 예닐곱 명이 한데 엉켜 책을 보고 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제일 나이 많은 형아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는데, 바싹 다가 앉은 아이, 의자에 앉은 아이, 누군가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는 아이까지 어찌나 편안해 보이는지 한 집의 아이들이라도 쉽지 않을 광경이다.

   

 

이번에는 연령 차이가 좀 더 나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책을 읽고 있는데 참으로 기묘하다. 우선 정면에 보이는 살집 좋은 등판은 체육관이라면 모를까 책하고 어울리는 분위기가 아니다. 후드티의 모자를 뒤집어 쓰고 빨간 반바지를 입은 양이 뒷모습이라도 위압적인데, 그 옆으로 갓난 아이에서 서너 살짜리들을 거쳐 열 살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 그리고 마흔 살쯤 되어보이는 어른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책을 보는 것이다. 가족이 아닌 어른과 아이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모습이 낯설기만 한데 게다가 그들을 한데로 모아준 것은 고리타분한 책이다! 아까는 장판이 깔린 온돌방이고 지금은 마루에 깔린 카페트에 앉았는데 모두 좌식이다. 70년대의 대가족, 혹은 마을 사랑방에서나 가능했던 장면이 사립도서관에 재현되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아니 가슴 벅차다. 벽에는 스프레이로 커다랗게 휘갈긴 낙서가 있다. “사랑해. 소녀그리고 하트, 또 하트. 이건 또 아이들에게 이만한 숨통을 틔워 준다는 소리.



용인 수지에 있는 사립공공도서관 느티나무의 전경이다. 3층 건물이라 앞서 말한 좌식 공간 외에 우리에게 익숙한 도서관다운 장면도 많다. 그래도 조금은 다르다. 나무 바닥, 나무 책꽂이, 나무 책상, 나무 계단의 은은한 색감이 따스하기 한량없고, 여기저기 삼삼오오 책을 보는 사람들의 집중력이 종이를 뚫고 느껴질 듯하다. 심지어 책꽂이 옆의 편편한 소파에 엎드려서 책을 보는 아이들도 있다. 일반적인 도서관의 형식이 파괴된 자리에서, 느티나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분위기가 샘솟는다. 도서관이 이렇게 자유분방하고 매력적일 수 있다니, 살짝 문화적 충격에 빠질 정도다. 설립한 지 15년이 되었고, 개인과 단체의 기부금으로 운영하는데 자본금이 30억을 넘는다. 이렇게까지 자리 잡은 데는 박영숙 관장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88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시절, 공부방 활동을 하던 대학생은 깊은 충격을 받는다. 78세대가 모두 시각장애인 가족이었다. 아이들은 앞 못 보는 부모의 길잡이로, 혹은 행인의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 전철에서 하모니카를 불거나, 역 앞 광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부모를 따라 일을 나갔다. 아이가 어릴수록 벌이에 보탬이 되는데 아이들이 금세 자라버린다면서 사람들은 자꾸 아이를 낳았다. 계집애는 함바집에 궂은일이라도 시키고 아들놈 덤프 운전이라도 할라믄 읽고 쓰고 셈은 할 줄 알아야 한다며, 우리 애들 제발 글자랑 구구단이랑 잘 좀 가르쳐주시라고 신신당부하는 한 가장의 모습이 박영숙의 뇌리에 새겨졌다. 이제 겨우 열 살밖에 안 된 아이들에게 너희가 누릴 수 있는 삶은 요만큼이라고 금을 그어버리는 그 아버지의 절망을 이해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원망스러웠다.이건 반칙 아닌가! 과연 이 세상 누구에게 한 사람의 꿈의 크기를 결정할 권리가 있을까.”

   

 

그 때의 경험이 그녀의 인생을 이끌었다. 그녀의 20대도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스무 살에 6년간 투병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격변하는 80년대 후반의 대학생활과 살림을 병행하느라 늘 고단했다. 책에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팔순이 된 아버지를 편하게 대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벗이자 동지이자 연인인 사람과 가족을 이루고 아이를 낳으며 아버지와 화해했고, 서서히 도서관과 조우한다. 1999년 당시 수지가 소읍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변두리로 밀려난 원주민아이들을 품을 수 있는 공간을 시도하다가 유네스코 공공도서관선언에 접한 것이다.

   

 

공공도서관의 서비스는 연령, 인종, 성별, 종교, 국적, 언어,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위한 균등한 접근 원칙에 입각하여 제공된다

   

 

누구에게는 그저 의례적일 문구가 그녀에게 이르러 진짜 혁신이 된다. 도서관은 그녀가 학창시절부터 품어 온 통합공공성을 실현할 수 있는 좋은 터전이었다. 자신의 둘째 아이를 포함해서 느티나무의 아이들은 학교에 안 가는 아이들이 많았단다. 느티나무에서 처음으로 사람 대접을 받아 본 아이들이 그녀를 "간장! 간장!" (관장의 애칭) 이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대하기까지 얼마나 정성을 들여야 했을까!  서두의 문신한 청년이 그랬을까, 그 중에는 어떻게 나 같은 놈한테 책을 주냐고감탄하는 아이도 있었다. ! 말이 그렇지 기부금으로 도서관을 이만큼 키우려면 도대체 얼마나 부지런하고 독해야 할 것인가. 사진으로만 접해도 평화가 배어나오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자발적으로 책을 읽는 동네 사랑방을 일군 것 외에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카드제작이며 낭독회, 이주민을 위한 다문화도서, 작은도서관지원사업, 동네아빠학교..... 그녀의 책 <꿈꿀 권리>에서 접하는 느티나무 이야기에 감탄할 뿐이다. 도서관이 운동이 될 수 있다며 젊은 날의 문제의식을 완성해 나가는 그녀의 헌신과 근성에 박수를 보낸다. 무릇 만인의 <꿈꿀 권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발걸음에서 시사받는 바가 클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지라도 남들보다 한 발 먼저 깨달은 보물을 전달하는 방식은 똑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도서관이 간직한 보물들을 사람들이 알게 할까. 단 한 번이라도 도서관서비스에서 감동받을 기회를 꾸준히 만들어가는 것, 그리고 도서관에 들어서는 길목부터 찾아오는 사람들을 환대하고 지적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고 북돋울 방법을 끊임없이 찾고 실천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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