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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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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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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9일 10시 57분 등록

 

오두막을 나와 외박의 날을 보낸 지 사흘째. 네댓 시간씩 계속 토해낸 강연을 매일 한 탓인지 어제는 몸이 물 젖은 솜처럼 늘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오전에 지방에서 세 시간 강의를 마치고 한 출판사의 대표를 만나 낮술을 겸한 점심을 먹은 뒤 저녁이 가까워 기차에 올랐더니 저절로 눈이 감겼습니다. 잠시 눈을 붙이고 광명역에 내렸습니다. 아직도 햇살은 따갑고 아스팔트는 뜨거웠습니다. 픽업을 위해 마중을 나와 있겠다던 분은 약속보다 20분 쯤 늦게 도착했습니다. 차에 올라 안전띠를 메는 내게 오늘 몸이 무척 무거워 보인다고 그분이 염려를 건넵니다. 선생님들 앞에 서는 순간 바로 싱싱해질 테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몸이 느끼는 묵직함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강의 장소에는 먼저 도착한 선생님들이 몇 있었습니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각자 빵 두어 조각과 김밥 한 줄을 먹고 있었는데 일과를 마치고 도착하는 다른 유치원 선생님 한 분이 깊은 한숨과 함께 이렇게 혼잣말을 토했습니다. ‘- 힘들어.’ 그 탄성과도 같은 혼잣말은 묵직했습니다. 종일 아이들과 놀아주고 잔무를 정리하고 다시 저녁에 공부를 하자고 오신 선생님들도 나와 다르지 않게 피로감이 가득할 수밖에 없을 상황이 충분히 이해되었습니다. 나와 선생님들이 함께 느끼고 있는 그 피로감을 떨쳐버리고 서로 의미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내게 주어진 과제인 셈이었습니다. 두 시간 예정의 강의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 “선생님들은 요즘 어떠세요? 출근할 때 설레세요?” “......” 잠시 싸늘했다가 모두 슬픈 웃음을 낮게 흘렸습니다. 제 아이 밖에 모르는 유별난 학부모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교사로 일한다는 것이 어떻게 설렐까요? 지금 이 사회에는 자연에서 뛰놀고 생명을 마주하며 자라도록 숲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기 시작하는 유아교육기관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담당 선생님들은 자주 곤욕을 치릅니다. 자기 아이가 흙을 묻혀 왔다고, 자기 아이가 벌레에 물린 상처가 있다고, 자기 아이가 친구와 다투었다고온갖 항의, 심할 경우 물리적 상처까지 감내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또한 유아교육기관은 전학절차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언제든 다른 보육기관으로 옮겨갈 수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학부모들의 눈치를 살피는 상황에 있는 곳도 많습니다. 설레기보다는 차라리 염증을 느끼며 일하는 것이지요.

 

그런 현실을 잘 알면서도 나는 물었던 것입니다. 출근이 설레느냐고? 그 냉소적 반응은 십분도 되지 않아 무너졌습니다. 오히려 뜨거워졌습니다. 예약한 하행선 기차 한 대를 그냥 보내고 막차 바로 앞 차를 타야할 만큼 강의는 길어졌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다 나주지 못했습니다. 선생님들은 다시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언제고 다시 기회를 만들면 또 오겠노라고 약속을 하고 광명역으로 돌아왔습니다. 배가 고팠지만 역사에 있는 모든 음식점과 찻집이 문을 닫은 뒤였습니다. 몸은 다시 땅으로 꺼지려하고, 눈은 침침했습니다.

 

배웅을 하시는 선생님과 잠시 환담하는 사이, 그 늦은 밤에 전화가 울렸습니다. 낮에 내게 6월 중순 어느 일요일에 강원도 낙산사 근처로 강연을 와달라고 요청했던 그 공직자였습니다. 목소리는 술에 젖어 있었고 주변은 시끄러웠습니다. 그가 강연을 요청한 그날 나는 포항에서 아침을 맞기로 되어있습니다. 영남권의 꿈벗들과 스승 구본형 선생님을 그리며 12일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예정이지요. 토요일 부산에서 여섯 시간 동안 숲전문가들에게 강의를 마친 뒤 저녁에 꿈벗 포항 모임에 참석해서 하루를 묵고 숲으로 돌아올 예정이므로, 도저히 강원도까지 가서 조찬 강연을 할 수가 없다고 사양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직자분은 포기를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3년 전에 세종시에서 나의 강의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번에 자신이 책임을 맡게 된 환경미화원과 담당 공무원들을 위로하고 자부심을 갖기 위한 12일 워크숍을 기획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동료 중에 누군가가 새벽에 운전을 하고 포항까지 내려와서라도 나를 데리고 올라갈 테니 꼭 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몸은 피로해 목소리가 갈라지는 상황에서도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이런 사람 어디 있을까? 공직자 중에 이렇게까지 열정과 목적의식을 품고 그것을 실현하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그는 일 년 내내 가장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고생하고 있는 자기 부서 사람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라며 끝까지 나를 설득했습니다. 결국 나는 그의 설득에 거의 다 넘어간 상태로 통화를 마무리 했습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눈을 감고 생각했습니다. ‘, 그 양반은 설레며 출근하겠구나. 매일 설레겠구나.’

 

왜 설레지 않는지에 대해 두어 주 전 쯤에 편지를 드린 적 있지요? 설레임과 설렘에 차이가 있다고, 설레이는 것은 내가 주인이 되어 일으킨 감정이 아니라고, 그것은 분별과 허상이 일으킨 감정이라고, 스스로 안에서 일으킨 감정이 바로 설렘이라고... 어제 겪은 하루의 이야기에서 혹시 설렐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읽혀지시는지요? 자신의 직업과 일에서 설레려면 그것이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나를 위해 일하지만, 결코 나만을 위해 일하지 않는 것이 내가 일을 하는 태도일 때 그 일은 아무리 힘겹고 피로해도, 심지어 상처를 입어도 설렘이 멈추지 않습니다. 내 일을 통해 세상에 작은 꽃들이 피어나는 느낌을 느껴보세요. 만났던 유치원 선생님들에게는 아이들이 꽃으로 피게 하는 숭고함이 있는 것이고, 그 공직자에게는 시민과 고생하는 부하가 모두 꽃처럼 피어나게 하는 숭고함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설레지 않는다면 내 일에서 그 소박하지만 위대한 숭고함을 잊은 탓이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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