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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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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0일 07시 53분 등록

여객선 침몰 현장. 잠수 사들이 차가운 바닷물에 몸을 담구면서 기도를 올린다.

‘우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아저씨 따라서 어서 나가자.’

 

어머니와 자식 간은 어떤 인연으로 맺어져있는 끈일까. 아직 돌아오지 않는 자식을 찾기 위해 어머니는 오늘도 그 긴 밤을 지새우며 차가운 바다를 헤맨다.

병원. 온통 하얀색으로 도색된. 차가운 금속성의 섬뜩함이 심장을 파고든다. 이곳의 사람들은 별다른 표정이 없다. 언제인가 웃음을 잃어버린 내부 건물의 공허함처럼. 간호사의 호출. 나의 이름인가. 텅 빈 낯선 방. 임철우가 묘사한 끔직한 <붉은 방>은 아니건만 그곳은 외계의 공간이다. 사춘기시절 그렇게 애달프게 보고 싶어 하던 외설잡지와, TV만 틀면 원색적인 영화 화면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곳. 그럼에도 남성의 상징은 아무런 감각이 없다. 나는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왜일까. 가만히 상념에 잠겨있던 나. 시계 바늘의 딸각거림에 그제야 깨닫는다. 어떻게든 임무완수를 해야지. 하얀색 액체를 비커에 담아 간호사에게 건넨다. 일련의 기계적인 작업. 처음 경험했을 때보다는 익숙한 느낌이다.

 

병원임에도 아이의 울음소리가 없는 곳. 사람들은 이곳을 불임병원이라고 칭한다. 당사자이든 보호자이든 모두의 어깨는 주눅들어있고 감정은 메말라있다.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무언가 죄를 지은 냥.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서 그들의 목적성은 단하나. 아이를 가지는 것이다. 남녀의 결합인 성스러운 결혼식이 마치고 나면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새로운 탄생의 순간. 어떤 이에게는 이것이 한평생 짐으로 옭아 메어져 절대적인 소원의 명제가 된다. 한번, 두 번. 횟수를 거듭하면서 그들의 반복적인 시도는 고시공부에서의 머리를 싸매는 확률게임으로 변한다. 배팅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용하다고 하는 병원을 찾아다니고, 좋다고 하는 민간요법에 머리를 들이민다. 결사적인 전투. 이유는 하나. 세상 사람들의 평균치에 탑승하기 위해 혹은 모성애적인 본능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다. 당연히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일반 사람들의 의식수준에 그들은 목을 맨다. 착상을 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상상 임신에도 젖어든다. 과정의 힘듦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결과 통보의 받아들임이다. 사체를 찾았다는 소식에 혹시나 내 아이일까 하다가 역시나로 세월호의 어머니가 자지러지는 것처럼, 대학 입시의 전환점도 아니건만 그 한숨은 꺼질 듯 먹구름이 된다. 어떡하지. 주사바늘의 흔적이 이젠 한계에 도달했을만한데도 아이가 뭔지 또 다른 시도를 한다.

“선생님, 얼마나 하면 성공이 될 수 있을까요?”

마지막 선택의 문인 시험관 아기 시술. 주눅 든 보호자의 질문에 의사 선생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다. 뭘까. 저 웃음은 뭐지. 비웃음인가. 한심스러움인가. 그는 뒤쪽의 서류뭉치를 가리킨다. 자신의 키 높이만큼 자라있는 그것은, 앞선 부부들이 거쳐 간 금단의 열매를 따기 위한 처절한 실패의 흔적들이다.

“아직도 멀었습니다.”

아직도 멀었다. 매스컴에 자주 얼굴을 내민다는 그는 지겹지도 않은지 늘어진 테이프의 반복되는 대사를 다시금 지껄인다.

 

세월호의 어머니들은 노래한다.

나의 자식은 얼마나더 구천을 헤매어야 하는지.

그놈은 어미가 보고 싶지 않은지.

어여, 나와라. 어여.

 

얼마나 가야할까. 도대체 이 저물지 않는 고통을 얼마나 계속해야 하늘이 감동하는 걸까. 여인은 말이 없다. 어깨의 들썩거림. 나는 그 어깨를 감싸 안는다. 내가 할 일은 이것이 전부다. 스스로의 감내. 그 응어리진 곪음이 애써 터져 나온다.

 

어머니의 발인일. 남아있는 사람들은 그 삶을 이어가기 위해 밥한 올 목구멍에 집어넣고 우적 인다. 침묵. 외삼촌이라는 분은 오래전 잊힌 현상에 다시금 불을 질렀다.

“이제 어떡하노. 이 씨 집안에 대가 끊겼으니.”

무슨 말이야. 이런 상황에 왜 그런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것일까. 슬쩍 그녀의 눈치를 본다. 좌불안석. 수저를 들고 있던 그녀는 손을 떨어뜨린다. 왜 그녀에게 화살이 돌아가는 걸까. 도대체 자식이 없다는 것이 무어 그리 욕되게 하는 것인지. 그랬다. 장인어른도 그러했다. 곱게 키운 딸자식을 시집보내고 나서도 그들은 곧잘 이야기한다.

“이 서방 미안하네.”

무어가 미안한 것일까. 오히려 철없는 남편을 이만큼이나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 해준 당신의 딸에게 고맙다는 인사말도 모자랄 판에.

 

자식이 있든

자식이 없든

여인은, 우리의 어머니들이 그러했고 그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그러했던 반복적인 유전인자를 물려받았다.

그런 그들이기에 아우성은 끝이 없다.

‘내 새끼 좀 찾아 주세요.‘

울음으로 목청 놓는 이 밤. 하늘은 여전히 이방인이다. 거센 비바람만이 응답을 하는 가운데 여인들은 오늘도 바다를 바라보며 기원한다. 얼른 나와라. 얼마나 춥겠니. 어미 품이 그립지 않니. 구본형은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에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인생과 인생이 만나는 것이다 (p138) 라고 하였다. 어미와 자식의 관계. 그 연결은 끝이 없다. 그 만남에서 어미는 아직도 자식을 기다린다.

IP *.160.13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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