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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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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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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5일 00시 42분 등록

 

간절히 만나고 싶은 그 누군가가 있었는지요? 지금도 그런 누군가를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요? 내게는 있었습니다. 더 젊은 날에는 딱 한 번만이라도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땅에 없습니다. 순전히 짐작이지만 그는 나와 엇갈려 먼 땅 어느 곳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다른 이유 없이 그저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마주하고 싶었던 그 사람, 그렇게 간절했던 그리움이 달처럼 차오르는 날이 많았었는데, 재미있게도 이제는 그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그리 간절하지는 않습니다.

 

그이를 만나고 싶은 간절함이 멀어진 것은 아마 세상에서 가장 그리웠던, 그러나 가장 만나기 어려운 그 사람을 만나는 행운을 가진 뒤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만나기 어려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가 누구인지를 나는 서른 후반에 알았습니다. 그건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그대는 어떠신지요? 그대 자신과 만난 적 있으신지요? 만난 적 있다면 언제였는지요? 요즘도 그이와 자주 만나고 계신지요? 大學에서 하늘이 나라는 생명에게 부여한 본래의 모습(天命之謂性), 그것을 따라 살기만하면 그것이 곧 가 된다고 말한 바(率性之謂道) 있는 그이와 얼마나 자주 만나고 계신지요?

 

나의 경우는 서른여섯 살, 오른쪽 어깨를 쓸 수 없을 만큼 몸에 균열이 왔을 때가 만남을 위한 전주였습니다. 아주 현란하고 화려한 일상을 보내던 그때 찾아온 뜻하지 않은 깊은 몸의 통증, 나는 내 몸의 그 현상을 무심히 놓치지 않고 깊게 따라가 보는 행운을 가졌습니다. 정작 술에 빠져 그 사태를 외면하고 잊어보면 지나갈 것으로 여겼던 1년여의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실패 뒤 등산을 시작하면서 나는 그렇게 마주하기 어려웠던 나를 어렴풋이 마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숲으로 이르는 길가의 풀 한 포기에서도, 바위를 뚫거나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는 나무들에게서도 내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들이 사는 형편이 나의 그것보다 결코 나아보이지 않는데, 또 살다가 입은 내 상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더 치명적인 그것을 온몸에 담고 있는데도 그들은 타자의 삶을 흉내 내거나 부러워하며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과거를 살고 있지도, 또한 미래를 살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저만을 위해 사는 것 같으면서도 숲 공동체에 공헌하며 깊어지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데올로기를 품은 존재가 단 하나도 없는데도 그들은 경쟁과 갈등, 긴장을 다루어 조화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다른 생명을 통해 나를 발견하는 눈이 열린 것은 내가 나를 만나는 작업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나는 숲에 머물며 숲을 거닐 때, 숲의 소리를 듣고 눈이 아닌 가슴으로 그들을 마주할 때, 모두가 찾아오지도 않고, 혹은 모두가 떠난 시간, 홀로 있는 숲 안에서 나는 가장 강렬하게 나를 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나 자신을 만나고 난 이후 나는 진짜 내 삶을 살아갈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에 시력을 잃어 바라볼 수 없었던 본래의 나, 그 진정한 내가 원하는 삶을 비로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숲은 그렇습니다. 그곳에서 가슴을 열고 침잠하면 세상에서 가장 만나기 어려운 사람인, 바로 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대도 숲에 자주 가세요. 홀로. 느릿느릿. 그리고 어느 순간 꼭 그 사람 만나기 바랍니다.

 

참고로 아직도 시퍼런 유용성을 지닌, 공맹과 노장이 길어 올린 그 깊은 사유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 보세요. 레퍼런스로 삼을 어떤 책도 없던 시절, 그들은 어떻게 를 알아챘을까요? 틀림없이 자연이, 그리고 숲이 모두 그들의 스승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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