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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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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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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7일 04시 17분 등록


 
 
 
딸과 함께 여행중입니다. 런던으로 들어가서 3개월에 걸쳐 발트3국,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마케도니아를 거쳐 이스탄불에서 나오는 제법 긴 여정입니다. 가방을 싸면서 수시로 먹먹해져 혼났습니다. 이것저것 궁리하며 옷을 고르고, 누룽지와 라면을 몇 봉지나 할까 가늠해볼 때마다, 제주로 수학여행을 떠나며 나와 똑같이 설레임과 긴장 속에 가방을 쌌을 아이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수없이 망설이며 마침내 꾸려졌을 아이들의 여행가방은 차디찬 바다에 잠겨 버렸습니다. 재잘재잘 들뜬 기대도 함께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제주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면 이렇게 아픈 마음이 조금이라도 덜어졌을까 싶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참사 앞에서  너무 감정이입이 되는 것이 두려워 의도적으로 생각을 끊어야 했습니다. 여행을 앞두고 유독 대형사고가 많아서인지 다른 때보다 걱정이 늘어난 것을 느끼며 저는 아이들에게 기도했습니다. 정말 미안하다. 너희를 잊지 않을게. 우리 사회가 얼마나 허약한지,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지를 보여주기 위해 너희의 희생이 필요했다면 온 국민이 실로 잔인한 수업을 한 것이 되었구나. 나도 겅중겅중 조심성없이 행동할 때가 많은데, 너무 깐깐하게 따지는 사람을 불편해 한 적도 많은데, 한 번 더 기본을 다지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게. 우리 사회 특유의 안전불감증과 경박한 이윤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될게. 부디 편안히 잠들기를......
 
 
런던! 이름만으로 위용이 넘치는 이 유서깊은 도시는 생각보다 번잡하네요. 일단 무단횡단이 기본입니다. 모든 신호등이 버튼으로 조작이 가능해 보행자 중심인데도 암묵적으로 무단횡단이 허용되는 분위기입니다. 가만히 보니 대부분의 도로 폭이 좁고 구부러져 있습니다. 8차선 이상 넓은 도로가 길게 뻗은 것은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대신 시내 중심가에서도 아기자기할 정도로 좁게 두세 갈래로 나뉘는 도로가 많아 지방의 중소도시에 온 것 같습니다. 딱 네 걸음이면 될 좁은 도로도 엄청 많아서 무단횡단의 욕구를 부추기는데, 재미있는 것은 횡단보도마다 “look left"나 "look right"가 쓰여있는 것입니다. 차 오는지 봐 가며 알아서 잘 건너라는 얘기로 봐도 되겠지요?  아무튼  무단횡단은 막연하게 영국에 갖고있던 인상을 뒤집어 버렸습니다.
 
 
 
오후 5시, 런던브리지를 넘어오는 직장인 부대에 깜짝 놀랐습니다. 금방 회사에서 빠져나온 듯한 차림의 남녀가 끝없는 행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장관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술집 앞에서 퇴근 후 한 잔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모두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피스룩 차림으로 가방과 옷을 땅바닥에 놓은 채로, 안주같은 것은 없이 커다란 맥주잔을 하나씩 들고 담소하는 모습도 참 신기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왜 승용차나 버스를 타지 않고 다리를 넘어 퇴근하는 것인지, 그 다음에는 지하철을 이용하는지(지하철도 엄청 좁던데!) 너무 궁금했습니다. 서서 한 잔 하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은지, 어떻게 이런 모습들이 정착되었는지, 요컨대 저는 그들의 일상문화가 흥미로웠습니다. 하지만  은밀한 속내를 알아야하는 일상문화는 고사하고  접근하기 쉬운 문학에 대한 준비도 없었으니,  떠나기 전 서둘러 책 몇 권을 읽었지만 런던에 대한 사전지식을 채우기에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제인 오스틴은 더비셔에서 ‘오만과 편견’을 썼고, 브론테는 하워스에서 ‘제인에어’를 로렌스는 미들턴에서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썼다. 피크디스트릭트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장면은 채털리 부인이 알몸으로 빗속을 뛰어다니며 꽃과 나무들 사이에서 갑작스런 해방감과 희열을 맛보는 장면이다. (정혜윤, 런던을 속삭여줄게)
 
 
영미의 역사와 문화가 거의 세계사요, 인류의 문화라고 봐도 무방한 상황에 내가 가진 지식은 너무 형편없어서, 아무리 대단한 과학자나 예술가라 해도 딱 이름을 아는 것에 그쳐 있었습니다. 대충 줄거리만 알고 있는 저 고전에 오마주를 품고 있지 않다면, 뉴턴과 다윈과 디킨스와 토마스 하디가 묻혀 있다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도 그저 잠깐의 눈요기에 그치는 것이고, 저 이름들이 익숙한 만큼이나 제 무지가 부끄러웠습니다. 그 부끄러움은 제가 애들 다 키우고 매이는 것 없이 자유롭게 살고 있기에 더욱 통렬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속박이 제일 싫었지, 누구보다 자유롭게 살고 싶었어. 돈과 명예 심지어 사람에게조차 욕심이 없어 어느 정도의 자유는 획득한 것도 같아. 그러나 나의 자유는 어디로 간 것일까? 한없이 널널한 하루와 무한정의 게으름 말고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자유롭고자 한 것일까?
 
 
 
여행은 나를 유체이탈해서 보게 해 주네요. 저는 여행의 초입에 이미 형편없이 무지하고 무취향한 나를 보고야 말았습니다. 미술관과 박물관이 무료라서 얼마든지 귀한 작품과 유적을 볼수 있는데도 반드시 봐야 할 품목 하나 갖지 못한 까막눈이 된 심경이지만 마냥 이 부끄러움에 머물러 있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사후약방문 이라는 말처럼 서구문화의 발원지를 먼저 접하고 차차 관심과 취향을 키워나가도 될 테니까요. 다시 세월호 생각이 납니다. 아이들이 보낸 첫 번째 카톡과 마지막 카톡 사이의 시간은 87분, 절대절명의 순간에는 차고도 넘치는 시간 아닌가요! 전원을 구조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참사를 빚고 만 것에 다시 한 번 분통이 터집니다. 그러다가 내가 허비한 그 많은 시간, 대충 처리한 그 많은 장면들이 이번 일을 거든 것 같아 진저리칩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조금이라도 촘촘한 시선을 갖고, 시간을 아까워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내 삶의 뼈대를 튼튼히 구축하는 일이 제주에 도착하지 못한 아이들을 기억하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소를 잃고 나서 외양간을 고쳐도 늦지 않겠지요. 두 번 다시 소를 잃어서는 안 되니까요.
IP *.174.1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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