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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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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0일 09시 50분 등록

칼 구스타프 융은 “인간의 삶에는 새로운 페이지가 펼쳐져야 할 순간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순간은 ‘결정적 순간’입니다. 불현듯 자기 존재의 본질을 깨닫거나 자기 삶의 비전을 통찰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결정적 순간’은 ‘진실의 순간’이자 ‘계시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언어의 명사수’로 불리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1967년 하버드 대학에서 진행한 ‘시인의 신조(信條)’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놀라운 표현력과 통찰력으로 이 순간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수 천 수 만의 순간들과 날짜들로 혼합되어 있더라도, 그 많은 순간들과 그 많은 날들은 단 한 순간, 즉 인간이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아는 순간,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순간으로 환원될 수 있다.


결정적 순간은 내면의 무엇과 외부의 현상이 부딪쳐 기묘한 화학작용 일으키는 ‘사건’입니다. 기묘한 사건이기에 결정적 순간을 겪은 당사자조차 이 체험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결정적 순간은 그 이전과 그 이후 사이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깁니다. 그래서 결정적 순간은 삶의 ‘변곡점’이기도 합니다. 버트런드 러셀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명쾌하고 깔끔한 문체’로 유명한 러셀이기에 그의 결정적 순간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1901년 사순절(四旬節, Lent) 기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러셀은 자신의 스승이자 10년 후 <수학 원리>를 함께 출간하는 화이트헤드와 그의 아내와 한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러셀은 지적인 면에서 ‘인생 최고의 절정기’에 있었고, 화이트헤드 부인은 심장 질환으로 아픈 상태였습니다. 어느 날 러셀과 그의 아내 앨리스는 영국의 고전학자 길버트 머리를 만나 그가 출간할 예정이던 번역서 <히폴리투스>에 나오는 시들을 감명 깊게 듣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화이트헤드 부인이 평소보다 훨씬 큰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러셀은 “그녀는 고통 때문에 모든 사람과 모든 것으로부터 차단된 듯 보였는데, 바로 그때 인간의 영혼은 모두 고독하다는 느낌이 느닷없이 나를 사로잡았다. 결혼한 후로 나는 정서상으로는 조용하고 피상적인 생활을 영위해 왔고, 좀 더 깊은 문제들을 모두 잊은 채 가벼운 지식인으로 만족해왔다. 그런데 갑자기 발 밑에서 땅이 무너지는가 싶더니 완전히 다른 영역에 들어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그 5분의 시간에 나를 스친 생각은 이러했다. ‘인간 영혼의 외로움은 견디기 힘들다. 종교적 스승들이 설파한 것과 같은 지고의 강렬한 사랑 외에는 어떤 것도 그 외로움을 간파할 수 없다. 이 동기에서 나오지 않은 것들은 모두 해로우며 잘해 본들 무용하다. 따라서 전쟁은 잘못된 것이고, 사립학교 교육은 옳지 않으며, 폭력의 사용은 반대해야 한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각 개인이 가진 외로움의 응어리 속으로 파고들어서 호소해야 한다.’”


러셀의 나이 29세 때의 일입니다. 기독교에서 사순절이 부활을 준비하는 기간인 것처럼, 이 순간은 러셀 안에 잠재해 있는 존재의 씨앗이 땅을 뚫고 올라오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전과 다른 삶이 펼쳐질 것을 알리는 전조였습니다. 결정적 순간은 각성과 회심(回心)을 수반합니다. 러셀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 5분이 흐른 뒤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동안 신비주의적 깨달음 같은 것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깊은 내면이 다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망상이었지만, 그럼에도 현실에서 모든 친구들과 수많은 지인들과의 관계가 전보다 훨씬 더 친밀해져 있었다. 그 동안 제국주의자였던 나는 그 5분 사이에 친보어파로, 평화론자로 변해 버렸다. 오랜 세월 정확성과 분석에만 매달려 왔던 내가, 미에 대한 신비한 감정, 아이들에 대한 깊은 관심, 인간의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 줄 철학을 찾아내고자 하는, 부처님 못지않게 깊은 열망으로 충만해 있음을 발견했다.


(...) 그 순간에 내가 보았다고 생각한 것의 일부가 계속해서 나에게 남아, 1차 세계대전에 대한 나의 태도를 형성시키고,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고, 사소한 불행에 신경 쓰지 않게 하고, 나의 모든 인간 관계에서 정서적인 부분을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이 순간은 러셀의 삶이 수학자의 길을 지나 전혀 다른 세계로 이어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수학자, 철학자, 교육자, 평화주의자, 인권주의자로서의 러셀의 삶이 한 순간에 압축되어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지향하며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 순간은 시간적으로 찰나에 불과하지만 그 영향은 한 사람의 삶 전체를 관통합니다. 러셀은 자서전에서 이 순간을 ‘인간의 본질적인 운명’을 깨우치게 된 순간, ‘운명적 순간’, ‘전환의 순간’ 등으로 부르며 여러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이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결정적 순간 속에는 한 인간의 전체성이 담겨 있다. 한 사람의 정수와 삶의 본질을 담고 있는 순간이다. 누군가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겪은 결정적 순간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진정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결정적 순간이 필요하다. 그 순간을 겪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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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 저, 송은경 역, 사회평론, 2014


* 20143월 ‘사회평론’에서 출간한 <인생은 뜨겁게>는 같은 출판사에서 20033월 두 권으로 출간한 <러셀 자서전>에서 ‘편지글’을 빼고, 1부의 프롤로그를 전체 프롤로그로 편집하여 다시 출간한 것입니다.


* 안내 : 문요한 연구원의 신간 <스스로 살아가는 힘> 출간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의 문요한 연구원이 <스스로 살아가는 힘>을 출간했습니다. 자세한 책 소개는 여기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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