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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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에는 12월 중에 단 한 번도 강의를 나간 적이 없는데, 송년 모임의 양상이 달라진 탓일까요? 올해는 부르는 곳이 여럿입니다. 먼 곳에 갔다가 숲으로 돌아온 늦은 밤. 아궁이에 장작을 지피고 하늘을 바라봅니다. 음력 17일의 달이 마치 보름달처럼 빛나자 숲은 은빛으로 화답합니다. 숲 속 바위 솟은 언저리에선 부엉이 푸호오- 푸후오- 오두막의 개들보다 먼저 숲 떠났던 나를 반깁니다. 저잣거리의 한 해는 아름다운 조명 아래서 사위고, 나의 한 해는 푸른빛 품고 은색으로 빛나는 숲을 지키는 부엉이의 노래와 함께 저물어 갑니다.
올 한 해는 참 바빴습니다. 마을사람들이 함께 공부하고 밥 먹고 일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잃어가던 공동체 문화를 되살릴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사업계획을 만들고 정부를 설득하는 일이 내 몸을 차지했던 한 해였습니다. 한편 내년 이 곳에 숲학교를 짓고 도시의 지친 영혼들이 머물러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기반시설을 만드는 사업계획을 만들고 역시 정부와 주변의 지인,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 내 마음 대부분을 빼앗은 한 해였습니다. 당연 딸 녀석과 함께 써서 마무리하기로 했던 어린이를 위한 숲이야기 책은 출판사 담당자의 속을 태우며 해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초여름에 시작했던 청산도의 사람과 바람과 물과 풀과 나무의 이야기를 담을 책 역시 해를 바꾸어서나 탈고를 마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 빚을 진다는 게 얼마나 마음 무거운 일인지 통감하며 연말을 보내고 있습니다.
새해 나의 삶은 역시 바쁠 것입니다. 숲학교를 지어야 하고, 숲 탐방로를 만들고 임산물도 심어야 합니다. 방문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체계적으로 홍보도 해야 할 것입니다. 정부가 지원하는 예산 8억 원에 더하여 스스로 부담해야 할 자금을 더 마련하기 위해 선한 투자자들을 조금 더 찾아 다녀야 할지도 모릅니다. 숲 속의 생활이 오로지 현재를 사는 방법을 터득하고 익혀온 시간이라고 자부해 왔지만, 지난 몇 날은 일이 내 삶을 휘두르더니 급기야 호되게 몸살을 앓게 만들었습니다.
아픔은 내게 있어 거울입니다. 나는 아픈 시간을 거울로 삼는 편입니다. 아픔은 나를 강제로 눕게 만듭니다. 고열에 몽롱해지고, 뼈마디가 쑤시며 한기가 느껴지면 외로움이 실존으로 찾아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모든 통증, 심지어 외로움에게 나를 맡기는 게 최선입니다. 이윽고 몇 날 만에 회복되어가는 몸과 정신 속에서 비로소 근자의 삶이 맑은 거울 위에 투사됩니다. 그간 느릿느릿 사는 것과 게으르게 사는 것의 차이를 구별 않고 살아왔던 것이 거울 위에서 들통이 납니다. 스승님 늘 말씀하시는 꾸준함에 나를 바치지 못한 일상도 아픔을 불러온 스트레스를 통해 폭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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