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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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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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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17일 11시 32분 등록

 

사랑하는 딸, 아비는 어제 오늘 글 멀미가 일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글을 읽고 쓰고 다듬느라 생긴 멀미이다. 지난주 어쩌다가 왼쪽 종아리 근육이 파열돼 걷는 게 무척 불편해졌는데 때마침 마감이 도래한 원고 작업이 네댓 개쯤 밀린 터라 월요일부터 노트북을 펴놓고 몇 꼭지의 글을 써대는 중이었다. 바람을 쐬고 싶은데 걷기가 힘드니 아예 창문을 열어두고 글을 썼다. 우선은 한 불교 관련 신문사에 연재하는 칼럼의 마감시간을 봄을 맞이하는 예의라는 글을 써서 겨우 지켰다. 그리고는 종일 인쇄를 앞둔 새 책의 막바지 교정을 보다가 프롤로그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인쇄를 앞둔 글을 아예 다 갈아엎고 새로 써서 보냈다.

 

이번 책에는 나름대로 내 40대의 삶과 번민과 사유와 통찰이 녹아있다. 숲으로 떠나와 살아온 지난 10년의 시간, 40대의 시간 전체 중 최근 5년 동안 숲과 삶을 통해 길어 올린 사유를 주제별로 묶고 새로 다듬어 펴내는 책이므로 새 책의 프롤로그는 숲에서 보낸 그 시간들에 대해 나름대로 어떤 시간이었다고 정리를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나는 어제 최종적으로 그 세월을 여름 꽃의 운명처럼 산 시간이라 이름붙이고 그 의미를 담아 프롤로그를 마무리 했다.

 

숲의 여름은 녹음(綠陰)으로 뒤덮이는 계절, 담록(淡綠)이 그치고 암록(暗綠)으로 변해버린 치열한 공간에서 암록색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제 꽃의 빛깔과 향기와 모양을 지켜내고 매개곤충을 부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여름 꽃의 운명이다. 단일한 빛깔로 물들어 가고 있는 세상, 지금 우리 시대를 삼키고 있는 저 신자유주의의 노도(怒濤) 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기획하고 자신의 빛깔과 향기를 추구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아비는 알고 있다. 얼마 전 TV 뉴스는 어린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었다는 어느 설문조사 결과를 보도했다. 한 초등학생의 대답은 하느님보다 위대하신 건물주님이 되는 것이었다. 아이의 그 생각을 만든 건 어른들일 것이다. 어른들의 생각을 만든 건 이 세계의 흐름, 인류 보편의 가치는 이제 저 천박한 단색(單色)으로 아이들의 생각까지 대체하며 물들고 있다는 생각에 아비는 소름이 돋고 두려움이 몰려왔다.

 

사랑하는 나의 딸도 곧 저 세계 속으로 들어서겠지. 암록의 단일한 색으로 뒤덮여버린 여름의 숲을 닮은 저 치열한 세계 속으로 나가는 중요한 관문이 우리 사회에서는 고3이지. 대입 시험에서 몇 문제의 오답 차이로 남은 인생의 상당 부분을 결정 받는 끔찍한 시스템. 이제 쉰 살이 된 아비는 이 나이가 되면 그런 천박한 세상이 조금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강화된 세상이 되었구나. 알고 있겠지만, 아비가 이 세상을 여름의 녹음에 비유하고 그 녹음을 암담한 녹색(暗綠)이라 은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암담한 세상 속으로 너와 너의 또래들을 내몰고 있는 현실에 어른인 아비의 책임이 없다 할 수 없다. 진심으로 미안하구나.

변명 같겠지만 그래도 아비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왔다. 그것이 지난 10년의 세월이었다. 누구나 그렇듯, 아비도 세상 전체를 바꿀 힘은 없으므로 그저 아비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통해, 나무와 풀이 그러하듯 하루하루를 잘 사는 것으로 아비가 발 디딘 자리 주변을 조금씩 바꾸는 삶을 모색한 세월이었다. 아비에게 하루하루를 잘 산다는 것은 스스로 기획한 하루를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스스로 기획한 하루를 보낸다는 것은 세상의 기준이 요구하는 하루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본성과 내면이 요구하고 열망하는 것을 따라 하루를 사는 것을 의미한다.

 

건물주님이 하느님보다 위대하다는 우리 사회의 가치가 한 여름 숲을 뒤덮는 암록처럼 세상을 뒤덮은 시대에 스스로 삶을 기획하고 그 기획을 따라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아비의 10년 삶은 위험을 추구한 삶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엄마와 네가 궁핍을 감당해야 했지. 스스로 원한 적 없는 전학을 해야 했고. 아비와 떨어져 산 시간이 함께 산 시간보다 많아야 했다. 생각하니 또 마음이 아프구나.

아비 역시 아비를 지키는 일이 쉽지 않았다. 때로 좌절했고 서러웠고 또한 노여움 가득한 날들도 있었다. 그래서 아비는 스스로 제 꽃을 피우고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독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는 그것들과 잘 지내왔다.

 

삶의 그 그늘진 측면들을 직면하고 비틀대면서도 다룰 수 있었던 힘은 자연이 가르쳐 준 위대한 지혜들 속에 있었다. 야생의 숲에 온실은 없다. 매순간 꽃들은 위험과 마주해야 한다. 여름의 치열함을 회피하기 위해 봄에 피어나는 꽃들에게도 또한 감당해야 할 늦추위와 빈곤한 매개곤충의 환경이 있다. 가을꽃 역시 다르지 않은 한계에 놓인 존재들이다. 세계를 향해 개방된 개개의 인간에게도 온실 같은 환경은 없다. 요샛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 역시 돈의 노예로 사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돈을 통해 삶의 깊은 차원에 도달하기보다 그 돈을 모으고 유지하기 위해 한 없이 끌려가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매일 뉴스에 나온다.

 

그래서 아비는 여름 꽃처럼 살아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암록에 물들지 않으며 나의 빛깔과 향기를 지키려 애써왔기 때문이다. 그간 숲이 보여주는 지혜를 통해 보이는 것 너머의 경지와 자주 만나는 날들 많았고, 그 지혜들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글 쓰고 강연의 길 떠나는 속에서 그 인연으로 만나는 사람들과 삶의 또 다른 가치와 차원을 나누며 기뻤다.

 

3이 된 딸, 이제 함께 앉아 밥 먹고 나면 후다닥 자리를 털고 일어나 책상머리로 가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아비는 안쓰럽고 미안하다. 여전히 암록인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한껏 긴장을 세우고 있는 딸을 그저 바라만 봐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애틋하고 미안하다. 어떻게든 이 시간들을 잘 건너가기 바란다. 하지만 이 시간의 암록에 물들지는 말기를 기도한다.

딸은 눈 속에 피는 이른 봄꽃처럼 살아도 좋고 서리 맞고 피는 가을꽃처럼 살아도 좋을 것이다. 다만 그저 너의 꽃이면 좋겠구나. 암록에 물들지 않는 여름 꽃, 눈 속에 얼어붙지 않는 봄꽃, 서릿발에 사위지 않는 가을꽃이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기꺼이 위험을 추구하는 것에 우리 생명과 인간의 중대한 실존적 가치가 있음을 놓치지 않기 바란다. 사랑한다. . 그리고 이 땅의 모든 또래들.

 

 

 

 

봄맞이 여우숲 자원봉사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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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숲을 아끼는 사람들 중에 뜻 있는 분들이 봄맞이 여우숲 자원봉사 축제에 함께 해 주시길 청합니다. 326일과 27일 이틀 동안 자발적 참여자들과 함께 청소도 하고, 화분도 만들고, 나무도 심고, 뺑기칠도 할 예정입니다. 여우숲의 인문학 공부모임 구성원 중에 기획에 재주 있는 이들이 세운 기획입니다. 고기도 조금 내고 명이나물 첫 잎과 봄나물을 뜯어 밥상을 차리고 노닐며 축제처럼 할 계획을 세워뒀습니다. 다리가 불편하긴 하지만 저도 함께 할 계획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우숲 홈페이지(www.foxforest.kr) 여우숲 소식 게시판을 참고하여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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