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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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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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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5일 23시 50분 등록

다시 나흘만에 오두막으로 돌아왔습니다. 집나간 첫날 여수에서는 공직자들을 만났고 이튿날 원주에서는 공기업 직원들을 만났습니다. 어젯밤 서울 서부에서는 유치원 선생님들을 만났고 오늘 오전 서울 북부에서는 농민 지도자들을 만났습니다. 오후에는 신촌의 한 대학에서 열린 심포지움에 참가하여 유아교육 분야의 열정 가득한 선생님들을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오래 전부터 내게 대단히 중요한 영감을 주고 계신 중요한 선생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돌아오니 달이 참 좋습니다. 모처럼 고즈넉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날이 추운데 장작을 마련해 두지 못했습니다. 발디딜 틈 없이 풀이 가득한 마당을 헤매봅니다. 가슴까지 차오른 풀섶에서 통나무 한 토막을 겨우 찾아 장작을 패고 불을 지핍니다. 몇달째 문득문득 일어서는 생각, 이토록 바삐 살지 말아야지 싶은 마음이 오늘도 또 고개를 듭니다. 내일은 또 멀리서 숲 강의를 듣자고 숲학교를 찾아오는 두 팀을 만나 낮과 밤에 각각 강의를 해야 하는데... 어서 눈덮인 겨울이라도 오면 나아질까... 이러자고 숲으로 떠나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또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매끈한 참나무 장작이 느린 박자로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는 동안 나는 나흘 여정의 마지막에 들러 뵈었던 선생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식물생리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으신 선생님은 한 국립대학의 교수로 임용결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 대학의 교수로 취임하지 못했습니다. 당신 은사의 권유로 어느 산골에 생긴 신생 대학의 신생 학과를 맡게 됩니다. 고민이 많았지만 존경하는 은사의 권유를 마다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식물학자로서 품었던 꿈은 좌절을 맞게 됩니다. 꾸준히 연구하고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 학자에게는 무척 중요한 일인데, 신생대학에는 연구에 필요한 실험기자재가 구비되어 있지도 구입할 여건도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무기력감이 들때마다 학교 뒷 숲을 거닐었는데, 우연히 만난 ‘큰오색딱따구리’에게 빠져들게 됩니다.


내가 그 분을 선생님으로 만날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그 분의 좌절감 때문입니다. 그렇게 만난 새에 대해서 누구도 시도한 적 없었던 참으로 감동적인 관찰기록을 대중서로 형태로 펴냈고, 내가 그 책을 읽게 된 것입니다. 나는 나의 첫 책 <숲에게 길을 묻다>의 ‘자식’ 편에 선생님의 귀중한 관찰 기록을 길게 다이제스트하여 실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일 년쯤 지난 어느날 선생님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맑고 깊은 눈, 야생을 누벼 얻은 구릿빛 피부색, 따뜻하고 편안한 말투... 나는 한 눈에 선생님께 반했습니다. 우리는 이따금 소식을 나누었습니다. 선생님은 이제 그 어떤 새 전문가보다 깊이 있는 새 전문가가 되셨고 새롭게 책을 출간할 때마다 내게 당신의 책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한 자리에서 유아교육 관련자들을 대상으로 서로가 알아채고 느낀 지식과 이야기를 대중강연 형태로 발표하며 재회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살아오다가 중요하게 키워냈던 가지를 하나씩 잃어버린 공통점을 가졌습니다. 선생님은 귀하게 쌓아온 전공분야에서 본의 아닌 좌절감을 만난 분이고, 나는 20대에 품었던 꿈인 대학의 선생으로 살고 싶다는 꿈을 달콤하게 느껴졌던 옃과 바꿔 부러뜨린 놈입니다. 그런데 정말 즐거운 것은 우리는 모두 잃어버린 가지의 상실에 갇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철마다 새를 관찰하며 새롭고 소중한 기록을 쌓아가고 있고 10년도 넘게 초등학교를 찾아다니며 과학교실을 열고 있습니다. 나는 전공과 무관하게 숲과 생명의 이야기를 인문・사회적 관점과 결합하여 풀어내고 있습니다. 모질게 고단한 날에도 대중들에게 자연과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 삶에 대해 깊게 성찰하고 새롭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 힘주어 소문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때로 단돈 5만원의 출강비를 받으면서도 초등학교 아이들을 만나고 계시다 했습니다.(여우숲에서 준비중인 이번 ‘겨울산촌유학캠프’에도 기꺼이 출강하여 아이들을 만나시겠다 했습니다.) 나 역시 몸살을 얻어 끙끙 앓는 날이 잦을 만큼 고단함을 느끼지만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숲과 생명의 이야기에 눈빛을 반짝이고 가슴을 덥히는 것을 느낄 때 찾아드는 이 환장할 것 같은 즐거움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살다가 삶의 가지 하나 뚝 부러졌다고 할지라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나무가 그렇고 풀이 그렇습니다. 부러지고 남은 가지나 줄기에서, 그것도 없으면 땅 속 뿌리에서 아픔을 이기고 올라오는 새 줄기나 가지나 잎을 키우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꽃을 피우고 마침내 열매를 맺어내듯, 우리도 부러진 가지 바로 아래에 새로운 눈이 숨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 눈을 틔워 새 가지를 피워내야 합니다. 나는 내일 기다리고 있는 또 한 번의 고단한 강의 일정을 기쁨으로 맞을 것입니다. 백오산방은 지금 푸른 달빛이 아궁이 붉은 장작불을 만나 춤추고 있습니다.

IP *.20.20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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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8 21:01:25 *.10.140.115

 

 

_P1040898.JPG

 

걸어서 출근하는 날이면 종종 이 나무 앞에서 잠시 서 있곤 했었지요.

지난 태풍 때 였어요.

나무의 가지가 꺽였는데  완전히 부러지지는 않아

가지가 매달려 있는 채로 말라가고 있는 사진입니다.

 

여전히 아무것도 들을 수 없지만

그가 전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하고 바라면서

기다려 보고 있습니다.

 

살짝 미치면 나무의 소리가 들릴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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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9 22:31:13 *.79.236.80

바쁘게 살고 계시군요.

빨리 겨울의 여유가 찾아와서 숲 이야기를 계속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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