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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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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3일 11시 00분 등록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 서안동 IC를 빠져나와 안동 시내를 향하는 모든 차들은 저 당당한 슬로건이 적힌 기와 대문을 지납니다. 사찰을 찾은 이들이 일주문을 통과하듯 4차선을 오가는 차량은 정신문화의 수도로 향하는 대문을 드나듭니다. 저절로 안동시의 슬로건을 읽게 됩니다. 2014년 7월이면 안동시는 이 슬로건을 사용한지 8주년이 되는 기념행사를 열 겁니다. 매년 그래왔으니까요.

 

슬로건 하나 내건다고 해서 변방이 갑자기 수도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무의미한 슬로건은 곳곳에 넘쳐납니다. 내실에 걸맞지 않은 슬로건 말입니다. 가게의 간판에서도, 지방자치단체의 선전 문구에서도 과대포장된 말들을 쉬이 발견합니다. 유명무실한 슬로건을 만나면 말뿐인 상찬에 헛웃음이 나옵니다. 명실상부를 추구하지 않는 장사꾼과 정치인들은 말의 현혹으로 진실을 흐립니다. 결국 사회에 눈에 띄지 않는 해악을 미칩니다.

 

고대 그리스어는 다른 문명권의 고대 언어와는 달리 어휘가 풍부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말을 하는 대신 복음에 귀를 기울이였다면, 그리스인들은 입을 열어 말을 하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름답고 반듯하고 논리적인 말을 하기를 추구했습니다. 그리스인은 말의 기술을 연구하는 수사학을 철학보다 우위에 두었습니다. 당시 수사학의 대가는 이소크라테스(BC 436~338)입니다.

 

이소크라테스가 열었던 수사학교는 높은 수업료에도 불구하고 당대 저명인들이 드나들었고,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 들어가기 전에 이 수업을 잠시 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소크라테스도 소피스트들과 구분하여 이소크라테스를 '철학자'라고 부르며 칭찬했습니다. 자신과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칭찬한 것은 아닙니다. 이를 테면, 이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교육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들이 수행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약속을 하는 대신 사실을 말하려고 했다면, 대중에게 그렇게 나쁜 평가를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소크라테스는 일찍부터 대중들을 ‘설득’(demagogia)하는 방법만큼이나 ‘진리’(psychagogia)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었다. 사실 그는 평생 ‘로고스’(logos)라는 그리스 말에 담긴 두 가지 의미, 즉 ‘이성’과 ‘언어’라는 측면을 모두 활용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숭실대 정치철학자 곽준혁 교수의 지적입니다. 그는 말의 기술과 진리 추구를 조화했기에 그리스 수사학의 대가가 되었습니다. 이소크라테스에게는 "훌륭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훌륭하게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수사학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에게 교양의 최고 덕목이었습니다. 초기의 대학들도 수사학은 중요하게 다뤄진 학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수사학은 '말만 번지르함'이 아니라, 명실상부를 추구한 언어표현이었습니다. 말을 잘 하는 것은 사실 아름다운 교양이고, 인간이 사회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로서 필수적인 능력입니다. 그래서 수사학의 지혜가 설득의 기술, 대화의 방법 혹은 논리학 이라는 학문으로 말을 달리하여 전해져 내려오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는 '수사학'에 편견이 있었습니다. '말만 번지르하다'는 순우리말이 내포하는 뉘앙스처럼, 왠지 말의 기술이라고 하니 내실은 팽개치고 겉모양만 가꾸는 것처럼 느껴왔습니다. 그런 제게 인문주의와 인간적 탁월함의 대명사인 로마인과 그리스인들이 수사학을 중요시했다는 점이 신선했습니다. 수사학에 대한 편견을 가진 이들이 저 뿐만은 아닐 겁니다. 수사학의 위상이 추락하고 말의 가치가 낮게 평가되는 데에는, 앞서 말한 정치인과 일부 장사치들처럼 말만 번지르한 사람들이 일조한 게 아닐까요?

 

슬로건을 내걸기 이전에도 안동은 이미 정신문화사에서 중요한 고장이었습니다. 조선 사상의 큰 기둥이었던 퇴계학파의 산실인 도산서원과 퇴계종택이 있고, 대대를 이어온 꼿꼿한 선비정신의 대명사 하회마을이 있습니다. (효심이 깃든 농암종택, 웅장한 규모의 의성 김씨 종가, 목조건축의 보고 봉정사, 그리고 서원 건축의 명품 병산서원도 빼놓을 수 없고요.) 안동은 명실상부한 정신문화의 중심지입니다. 

 

죽고 나면 한줌의 재가 되는 인생이라고들 말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조금은 허망한 표현입니다. 그러니 저는 "죽고 나면 한 줄의 슬로건이 남는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2014년 한 해를, 3월이라는 한 달을 슬로건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말이 될까요? 생각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이소크라테스의 수사학은 진리와 명실상부를 추구했음을 기억하시기를! 해마다, 달마다 명실상부한 슬로건을 창조하는 삶을 사시길 기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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