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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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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21일 08시 44분 등록

선암사(仙巖寺)에서 송광사(松廣寺)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습니다. ‘천년불심길’이라 불리는 12km 길. 편백나무숲이 있고, 계곡을 옆에 끼고 그리 높지 않은 산고개를 넘으며 풍광도 괜찮은 길, 도보로 4시간이면 넉넉하게 갈 수 있는 길입니다. 하지만 해가 짧은 겨울에 선암사에서 오후 1시 넘어 출발한 것과 평탄한 둘레길 정도로 지레짐작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한 마디로 준비가 부족했습니다.

 

서둘러 걸었음에도 5시 30분이 되어서야 송광사에 도착했습니다. 송광사 구경은 언감생심(焉敢生心). 태양은 오늘 일을 마치고 쉴 차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법정 스님을 만나기 위해 불일암(佛日庵)으로 향했습니다. 법정 스님은 입적하기 전 병상에서 이제 스님을 어디서 뵐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불일암이나 길상사에 오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답했습니다. 내가 불일암을 찾은 이유입니다.

 

법정 스님은 내 마음 속 스승입니다. 어디선가 스님이 “진정한 도반(道伴)은 내 영혼의 얼굴이다”라고 쓴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도반이 영혼의 얼굴이라면 스승은 영혼의 거울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법정 스님의 속가제자이자 <그대만의 꽃을 피워라>의 저자 정찬주 선생은 자신이 불일암에 가는 이유를 “스님의 흔적이란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 싶어서”라고 말합니다. 나도 같은 이유로 스님의 책을 읽고 이곳에 왔습니다. 정찬주 선생은 말합니다.

 

“불일암은 내게 맑은 거울이다. 불일암으로 가는 것은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나만 고집하는 ‘거짓 나’를 떠나 남을 배려하는 ‘본래의 나’를 돌아보게 한다.”

 

불일암 가는 중간에 표지판을 못보고 길을 잃어 헤매다 겨우 불일암 사립문 앞에 섰습니다. 참배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입니다. 사립문에는 참배 시간이 오후 4시까지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잠시 고민하다 무례를 범하기로 했습니다. 법정 스님이 즐겨 읊조렸다는 남송시대의 선승 야보도천(冶父道川)의 시가 떠올랐습니다.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움직이지 않고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 하나 없네

 

나 또한 흔적 남기지 않고 조용히 갔다 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조심조심 걸으며 불일암 경내에 들어섰습니다. 이미 해가 져서 컴컴했지만 익숙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스님이 직접 가꾸던 채마밭을 지나 주로 거하셨던 위채에 오르니 글로만 만났던 후박나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스님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꼭 한 번은 안았다는 나무입니다. 나도 스님처럼 후박나무를 안아봅니다. 생각보다 차갑지 않습니다. 오히려 따뜻한 느낌입니다. 정찬주 선생의 말처럼 후박나무는 스님의 내면과 외면을 닮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후박나무 밑에 스님의 유해를 묻은 것도 우연은 아닌 듯합니다.

 

법정 스님이 굴참나무로 만든 일명 ‘빠삐용 의자’도 보입니다. 앉아 보고 싶었지만 의자 위에 방명록과 사탕 바구니, 그리고 법정 스님 사진과 글을 담은 책갈피가 놓여 있습니다. 너무 어두워 방명록에 글 한 줄 남기지 못하고, 사진도 찍지 않았습니다. 사탕과 책갈피만 주머니에 넣고, 귤 2개를 의자 위에 놓았습니다. 사탕을 보니 <그대만의 꽃을 피워라>에서 읽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법정 스님이 불일암에 있을 때 젊은 스님들이 찾아와 법문을 청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스님은 호두알만 한 알사탕을 주었다고 합니다. 큰 알사탕을 입에 넣으면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외부에서 좋은 말 찾지 말고 눈앞에 펼쳐진 조계산을 바라보며 자기 안을 살펴보라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스님이 쓴 어떤 책을 보든 ‘침묵’을 강조하는 글이 몇 편씩 있습니다. 요컨대 “침묵의 체로 거르지 않는 말은 소음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스님 책에서 본 “입안에 말이 적고 마음에 일이 적고 배 속에 밥이 적어야 한다”는 문장도 기억납니다. 법정 스님이 상좌(上座) 스님들이나 재가 제자들에게 간곡하게 강조한 말입니다. 이 한 문장은 처음 본 순간부터 내 마음을 찌르듯 들어왔습니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씨앗을 가지고 있기에 이 문장과 공명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 다시 불일암을 와야 할 듯합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나다워졌기를, 준비가 되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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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저, 그대만의 꽃을 피워라, 열림원,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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