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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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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9일 01시 32분 등록

 

다시 여수의 작은 섬, 경도에 와 있습니다. 서울 공기에 지친 탓에 찬바람이 그리워 문을 열자 파도소리가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에 흐르는 피아노 음률처럼 평화로움으로 흐릅니다. 이따금 그 속에 섞여 빛나는 첼로의 묵직하고 깊은 소리처럼 파도는 고저를 이루는 가락이 되기도 합니다. 옅은 구름 속에 숨은 듯 숨지 못한 달은 아래쪽으로 배가 부른 반달로 처연합니다. 구름이 뭉개놓은 별빛들도 참 좋습니다. 먼 곳에서 빛나는 문명의 불빛과 함께 모두 한 폭의 그림을 이루는 밤입니다.

 

나는 이 섬에 자정 가까운 시간의 마지막 바로 전 배를 겨우 타고 들어왔습니다. 서울에서 볼일을 보고 타기로 예약했던 기차는 본래 오후 450 몇 분이었는데 나는 그 기차를 놓쳤습니다. 결국 720분에 출발하는 다음 기차를 타고 밤 112분에야 도착했습니다. 대전역이나 오송역, 혹은 서대전역을 주로 이용하는 내가 호남선이 서울에서는 용산역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깜박했던 탓입니다. 서울역의 어느 플랫폼에도 여수엑스포행 KTX는 없었습니다.

 

서울역에 아주 일찌감치 도착해 놓고도 착오 때문에 기차를 놓친 나는 난감하고 불길한 마음이 확 스쳤습니다. 순간 서울역에 도착하기 직전 어느 선생으로부터 들은 올해의 내 운세 이야기가 퍼뜩 스쳤습니다. ‘올해 당신은 벌려놓은 일 때문에 결코 순탄치 않을 것 같고, 감당해야 하는 곤란의 크기 역시 무척 클 것 같으니 단단히 각오를 하고 시작하라는 조언을 막 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소한 사건이 그 전조요 예고편인가? 어제는 살롱 9’에서 강의를 듣고 그곳에다가 핸드폰 충전기를 두고 내려오지 않았던가? ...’ 부정적인 생각이 한꺼번에 스윽 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삶에 리듬이 있음을 누구보다 굳건히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나무와 풀들도 순간순간, 한해 한해 삶의 리듬을 가지고 제 삶을 살아내고 있음을 보아 왔으니까요. 예컨대 소나무 한 그루가 어떤 해에는 갇혀서 뻗어나가지를 못하고, 다른 어떤 해에는 일취월장하는데 그것이 외부적 관계에 종속되는 모습인 때를 자주 봅니다. 함께 사는 개, 바다조차 제 삶의 우주적 리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녀석은 늘 12월 말 경에 새끼를 낳는데, 최근 두 해의 겨울이 너무 추워서 갓 낳은 새끼들을 제법 잃어야 했습니다. 올해도 새끼를 낳았는데, 다행이 따뜻한 날씨가 열흘 넘게 지속되면서 아직까지는 새끼들을 잘 지켜내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그렇게 나를 지배하는 어떤 외부적 리듬과 관계하며 흘러간다는 것을 나는 자연을 통해 알아차리게 된 것이지요. 우리는 긴 세월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인사를 건네 왔는데, 그때 그 복은 바로 그 외부적 리듬이 당신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한 해가 되라는 인사에 다름 아니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흐름을 미리 알아보고 그에 따라 삶을 대처해 보려 한 것이 곧 명리학이고 토정비결이고 다양한 갈래를 가지고 있는 점술인 것이지요. 그런데 방금 전 나는 어느 분으로부터 올 한 해 하늘이 나를 돕지 않는 해가 될 것이라는 조언을 들었던 것이고, 몇 가지 가벼운 해프닝을 겪으며 그 이야기가 떠오른 것입니다.

 

하늘이 특별히 나를 돕거나 혹은 돕지 않는 해가 있다고 믿으시는지요? 나는 그런 편입니다. 하지만 올 해 나의 삶이 어떤 리듬 위에 있을지 나는 잘 모릅니다. 그 선생의 표현대로 만약 하늘이 나를 돕지 않아 버거운 해가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이렇습니다. 그냥 그 속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려는 입장을 가진 사람입니다. 버거운 해가 전혀 없는 삶은 살아있는 삶이 아닙니다. 우주가 생명에게 버거운 시간을 배정해 놓은 데는 명확한 이유가 있습니다. 깊은 계곡을 거슬러 올라야 높은 산의 봉우리에 올라 찬란한 햇살, 달빛, 별빛, 장대한 풍광을 기쁘게 누릴 수 있듯, 버거운 시간을 통과해 내야 단련된 심신으로 삶을 거듭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늦은 시간 섬에 도착한 나는 묵기로 한 리조트의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픽업 서비스를 부탁할 수도 있었습니다만, 미리 안내를 받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와 거세진 바람을 맞으며 나는 항구에서 숙소까지 그냥 걸었습니다. 그렇게 거친 바람에 눈물을 흘리며 손이 곱아지는 순간에도 나는 달과 별빛과 파도와 바람의 압력과 소리를 온전히 누리며 걷고 있었습니다. 오두막 책상 위에 올려놓은 달력 첫 장에 씌어 있는 문구를 외치며 걸었습니다. ‘다가오라, 삶이여!’

숙소에 들어서자 참 좋은 온기가 온 몸을 가득 감싸 안았습니다. 찬바람 통과하고서야 느낄 수 있는 바로 그 소중한 온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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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9 17:54:02 *.124.106.117

선생님의 편지에 울림과 떨림이 있어 참 좋습니다.

'다가오라, 삶이여!'

한해를 시작하는 시간에는 더욱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편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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