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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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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3일 05시 06분 등록

아버지


큰 아들 철민이 입니다


어린 시절 이름이 철민이었고 초등학교 입학하며 개명을 해서 범용이란 이름으로 잘 살아 내고 있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무척 많이 맞고 자란 철민이는 어른이 된 제 마음 속에서 아직도 자주 울어요. 그래서 철민이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는 점 이해해 줄 수 있지요


오늘은 아버지에게 좀 따질게 있어서 편지를 써요. 아버지 얼굴을 마주하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철민이는 아직도 아버지가 무서워요. 그래서 이렇게 조금은 안전한 방법인 편지를 선택했어요. 아버지. 아버지가 평생을 바쳤고 철민이가 태어나고 자란 충청남도 당진이란 작은 시골 마을 풍경을 기억하나요


여느 시골처럼 제 고향도 사방에 펼쳐진 산과 들, 계절마다 옷을 갈아 입는 나무와 꽃들은 평화로운 장면을 연출했었죠. 하지만 한 곳 만은 그 평화가 허락되지 않았어요. 우리 집은 평화를 사 들이기엔 무척 가난했었죠. 가난과 평화는 마치 물과 기름처럼 어울릴 수 없는 경계선을 잉태했고 그 경계선을 지키는 파수꾼은 아버지의 몫이었죠


아버지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들판에 나가 일했어요. 아버지에게 가난은 마치 싸워 이겨야 할 지긋지긋한 괴물이었을 거에요. 배운 것이 부족한 아버지에겐 근면성실만이 가난과 싸울 최대의 무기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매일 새벽 들판에 나가 한바탕 가난과 싸우셨죠. 그리고 제가 일어날 시간인 아침 7시쯤엔 땀에 흠뻑 젖어 아침을 먹기 위해 집으로 돌아 오곤 했지요. 아버지가 뼈빠지게 새벽부터 일하고 돌아왔는데 자식인 제가 잠에서 아직도 달콤한 꿀을 빨고 있다니 아버지 입장에서는 자식의 나태함을 그냥 지나치기란 아버지의 인내심이 허락하지 않으셨을 거에요


이해해요. 하지만 전 고작 8살이었어요. 아버지가 들판에서 육체적 고통과 함께 지게에 짊어 지고 온 분노를 나머지 가족에게 화풀이로 떠넘겨야만 그제서야 직성이 풀리는 화끈한 분이었지요. 그렇게 아버지는 가난이란 괴물과 싸우다 보니 스스로 괴물이 되어 저의 어린 시절을 지배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괴물의 희생양은 저 혼자만의 몫이 아니었지요. 저에겐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어요. 어디선가 아버지 목소리만 들려도 저와 남동생은 눈치를 보며 뭐라도 하는 척 시늉을 해야 했어요. 남동생이 이미 깨끗하게 쓸고 간 앞 마당을 저는 다시 쓸고 있어요. 뭐라도 해야 하니까요. 그때 그 장면을 생각하니 지금은 피식하고 웃음이 나오지만 그때는 정말 아찔한 순간들이었죠. 그렇게 아침부터 피 말리는 눈치 전쟁이 시작되고 아침 밥상까지 긴장감이 연장되는 것이 다반사였어요


혹여 제가 밥에 들어있는 콩을 골라 내다 발각 되거나, 국에 들어간 파를 밥그릇 뒤로 몰래 숨기다 걸리는 날에는 아버지는 밥상을 한 손으로 뒤집어 엎어 버렸죠. 음식을 가지런히 담아내려고 태어났던 그릇들도 당황했는지 억울하다며 날카로운 소음을 냈고 그릇들의 몸 속에 품고 있던 음식을 토해내기 시작했어요. 흥건해진 방바닥은 엄마의 눈물까지 보태져 우리 양말을 적시고 가슴마저 적셨지요. 난장판이 따로 없었어요


그때마다 어린 철민이의 정신은 분열을 했고 다시 봉합되는 과정에서 공포와 조우했어요. 그 공포는 이끼처럼 제 심장을 덮어 나갔고 어느새 증오로 자라기 시작했어요. 어릴 때 왜 그렇게 국에 들어간 큼지막한 파를 제가 싫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국물의 대부분을 소고기보다는 파로 채울 수 밖에 없었던 엄마의 가난한 부엌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


만약 아버지가 철민이에게 따듯하게 칭찬 한번 해줬다면, 웃어 주었다면 어쩌면 공포가 증오로 자라지 않았을 거라 짐작해요. 그런데 맨날 혼나고 욕먹고 얻어 터지고 눈치 보며 살다 보니. ‘이 지옥 같은 집구석을 언젠간 벗어 날 것이다라고 주문을 걸며 버텼어요.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고 견뎠어요



아버지 그거 기억하세요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기대치가 하늘을 찌르고도 남는 분이셨죠. 제가 하는 모든 것은 다 맘에 안 들어 했어요. 아버지 기준은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 수준이 아니었어요. 뉴스에서 한국 학생이 올림피아 수학경시대회에서 우승했다고 떠들면 남의 자식은 잘만 저런 상도 타는데 너는 맨날 놀고 먹으면서 뭐하고 자빠진 거냐라고 화를 냈지요. 제가 성인이 되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기라도 하면 네 나이에 정주영은 현대를 만들고 돈을 수억 벌었는데 뭐가 힘들다고 회사를 그만두냐라고 비난하고 억지 비교를 해댔지요


아버지의 그런 밑도 끝도 없는 막무가내 비교에 어이가 없었어요. 그래서 저도 강하게 반박했어요. ‘아버지 나이에 링컨은 벌써 대통령이 되었는데 아버진 뭐 하고 계신 건가요?’ 하지만 아버지가 무서운 나머지 제가 만들어낸 반박은 목구멍을 타고 입 밖으로 탈출하기도 전에 주눅들어 연기처럼 사라져요. 왜 그러신 거죠 진짜? 아버지도 못 배우고 가난하고 무식한 농사꾼에 지나지 않으면서 저에게 뭘 그렇게 대단한 걸 원하시는 거에요? 자식 농사로 한몫 챙기시려는 속셈이었나요? 폭언과 구타만 제때 구사하면 자식이 크게 성공할거라고 누가 아버지에게 감언이설로 꼬드겼는지요


아버지는 가정법을 사랑했죠. 아버지의 아버지, 즉 나의 할아버지가 아버지 공부만 시켜줬으면 대통령을 하고도 남았을 거라고요. 저도 아버지가 절 사랑으로 키웠다면, 철민이에게 다정하게 책 한 권만이라도 직접 읽어 주었다면 저도 대기업 총수가 되었을 거에요. 제 논리가 기가 막히시죠? 아버지 논리에 기가 막히고 속 터져 죽을 뻔한 사람들, 우리 가족 안에 4명이나 더 있어요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저도 결혼하여 자식까지 있어요. 하지만 아직도 아버지와 대화는 힘들어요. 아니 하고 싶지 않아요. 옹고집으로 똘똘 뭉쳐서 상대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당신 얘기만 계속 주장하며 화만 내고 욕을 해요. 그런 분을 상대로 말을 걸어야 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무서워요. 대학원까지 나온 자식이니 책을 찾아보고 커뮤니케이션 방법에 대해 공부한 다음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후 아버지에게 논리적으로 말을 해봐요. 소용없어요. 아버지의 무식한 욕지거리는 제 머리를 하얗게 만들어요. 제 시스템은 어느덧 경고음을 울리고 대화를 중지해요


아버지


철민이에게는 아버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어요. 아빠가 필요했어요. 잘못해도 웃어주고, 넘어져도 일어설 수 있다고 용기를 주고 응원해주는 아빠요. 학교에서 1등을 하면 우리 철민이 장하다. 아빠는 철민이가 자랑스러워라고 말해주는 아빠요


이제 철민이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못해요. 그러니 이젠 범용으로 살아가는 저에게 “그 동안 미안했구나. 철민아이렇게 제 어릴 적 이름을 불러주며 말해주세요. 그 말을 편지에 꾹꾹 눌러 써서 아직도 당진 시골 마을에 살고 있는 철민이에게 부칠게요


그러니 마지막 숨을 내쉬기 직전까지 이 말을 미루지 말아 주세요. 아직도 아버지를 피해 다니며 시골 집 구석에서 울고 있는 철민이를 이젠 위로해 주세요


아버지를 이젠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철민이의 대답은 들으셔야죠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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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5 19:42:27 *.133.149.97

전통적으로 한국문화에서 아버지의 이미지는 부정적입니다. 

저도 여자들과는 같은 밥상에서 밥도 먹지 않으시고, 자식들 앞에서는 소리내서 웃어보이시지도 않던 아버지 밑에서 컷거든요.

그래서 전 친구같은 아버지가 목표였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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