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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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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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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23일 00시 45분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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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살 된 딸 녀석이 이제 사춘기를 맞았습니다. 녀석의 주어진 인생의 시간에 봄이 찾아 든 것입니다. 키도 훌쩍 컸고 몸매도 어린 아이의 티를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에는 작은 여드름이 몇 개 송송 박혀있습니다. 추석을 쇠고 녀석을 데려와 자자산방에 머물게 했습니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여서 아궁이에 불을 지펴 구들을 데웠습니다.

 

자자산방의 아궁이 공사를 마무리하면서 나는 딸 녀석을 떠올렸습니다. 녀석과 아궁이 불 가에 앉아 고구마와 감자, 밤을 구워먹는 상상을 하면서 녀석이 걸터앉기 좋을 자리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오늘 녀석을 위해 숯불에 고구마와 감자를 구워주었습니다. 입가에 검정을 묻혀가며 고구마와 감자를 먹는 녀석의 모습을 보면서 괜히 마음이 좋습니다. 녀석이 아비의 삶에 대해 어떻게 여기건 아 이렇게 살기를 잘했다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녀석은 제 엄마의 렌즈로 아비를 보는 일에 익숙해 있습니다. 아비보다 어미와 보내온 시간이 훨씬 길고,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수록 모녀간의 소통이 부녀간의 그것보다 더 내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간혹 툭툭 던지는 말에서 나는 녀석이 제 아비의 삶에 대해 어느 정도 불만이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지만, 그래도 녀석의 말 속에서는 더 넉넉하고 더 화려한 삶을 사는 아비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슬쩍슬쩍 묻어나곤 합니다. 하긴 세상과 학교로부터 보고 듣고 배우는 세계관이 그런 쪽으로 경도되어 있는 시대이니 녀석에게 그런 구석이 없다면 그 역시 이상한 일이겠지요.

 

나는 자식이 아비가 낀 안경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경계합니다. 아비의 한계가 자식의 한계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마음으로 딸 녀석을 대합니다. 나는 그렇게 세속화된 세상에 대한 경계심이 짙은 놈이지만, 녀석에게 아비를 닮은 그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는 힌트나 귀띔, 혹은 생각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아빠들의 삶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아비의 그것을 해명하거나 정당화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비의 삶을 보여주려 할 뿐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도 삶의 한 방식이고, 아비에게는 이런 삶을 통해 모색하는 어떤 방향성이 있으며 그것으로 삶이 기쁘기도 하고 고되기도 하다는 것을 가감 없이 보여줄 뿐입니다. 어느 순간, 그것이 아비의 선택이었고 아비의 인생이었구나 생각할 수 있게 해주고 싶을 뿐입니다.

 

일상의 편리를 구하고 경쟁력 있는 학교 공부를 위해서는 도시가 좋고 확실히 서울이 좋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세상이 인정해주는 젊은이로 성장하기에는 서울이 최고의 장소가 된 지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서울 중에서도 강남을 비롯한 몇몇 지역이 최고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딸 녀석이 오늘날 세상이 이야기하는 그 성장의 중심부를 향해 자신의 사춘기와 소녀시절의 시간을 몽땅 털어 넣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성장의 궁극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은 효율과 합리성, 편리와 풍요를 성장의 궁극으로 삼지만 그를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 역시 무시하기 어려운 상실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기름보일러 아닌 구들방을 누리기 위해 나무를 하고 불을 지피는 수고를 경험해야 하는 딸, 고구마와 감자를 구워먹기 위해 알 불이 필요하고 간혹 숯 검댕이도 묻힐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딸, 고구마 한 조각을 얻어먹고 싶어 아궁이 앞에 모여드는 개에게 자신이 먹을 한 입을 내어줄 줄 아는 딸.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딸 녀석이 성장의 궁극이 나의 유익만이 아니라 타인과 다른 생명에게로 확장되는 것에 있다는 점을 자연스레 알아갔으면 합니다.

IP *.20.20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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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4 07:29:20 *.160.33.180
용규야 , 명절은 잘 보냈느냐 ?    꼭 너를 닮은 딸이구나.  

어제는 달이 앞 산 위에 숨어 있는 순간 부터 서서히 떠 올라 산을 벗어날 때 까지 지켜 보았다.   순식간에 떠 올라 하늘을 거닌다.  날은 아직 어둡지 않았으나  달을 즐기기에 더 없이 청명한 가을 저녁이었다.  오늘은 아마 더 늦게 떠 올라 완전히 어두워 진 다음에 그  모습을 보여 줄 것이다.    달빛의 그윽함은  산들 바람을 안고 걷는 여인의 옷자락같아 그 끌림의 소리와 향취에 젖어들게 한다.   자자산방의 달빛이 고와 잘 수 없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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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규
2010.09.24 11:08:14 *.20.202.217
스승님. 추석 잘 쇠셨는지요?
전화나 문자로만 인사드리는 일이 송구하여 명절 문안을 여쭙지 못했습니다.
이 고질적인 수줍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

이제 그 많던 비가 물러갔겠지요? 오늘은 바람도 햇살도 참 좋은 아침을 맞았습니다.
모처럼 밀린 빨래를 잔뜩 해서 널었습니다.
좋은 날이 찾아왔으니 스승님 한 번 찾아주시면 어떠실지요?
저 자자산방에 아궁이에 불 지펴 스승님 모시고 싶은데, 어느 여유로운 날로 잡아주시면 어떠실지요?
함께 뉘여 다독여주고 싶은 제자 있으시면 대동하시고 찾아주시면 어떠실지요?
달이 좋아 잠자기 아까운 날로 찾아주시면 금상청화이겠습니다.

스승님 뵈올 날 고대하오며,
흰 까마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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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
2010.09.27 07:56:53 *.182.176.229
'자식이 어미의 렌즈로 세상을 보는 일에 익숙해 있다'라는 말씀.
어제 어머니와 형제들이 모두 병원에 누워 계신 아버지를 뵙고 왔습니다. 마음이 찡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또 느꼈죠.
유별난 아버지를 바라본 어머니의 불만 섞인 시선을 제 동생이 많이도 닮아 있더군요.
자신이 만든 시선이 있을 법한 이런 나이에도 말이죠.
자식을 둔 어머니로서의 제 모습을 다시 되돌아 봅니다. 부모란 이렇게 쉽지 않네요.
 어느새 그곳은 군불을 떼워야 하는 날씨가 되었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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