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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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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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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8일 01시 30분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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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산방 마당에는 특별한 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이 무렵이면 선홍색 꽃을 머금었다가 피우기 시작해서 여름이 다 가도록 100일쯤 마당을 붉은 빛으로 물들이는 나무입니다. 배롱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나무는 요새 조경수로 많이 쓰이고 있어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게 이 나무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 나무입니다. 왜냐하면 스승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도시의 삶을 버림으로써 나 아닌 나의 삶을 접고, 나다운 삶을 살고자 이 백오산방을 짓고 입주하던 때에 스승께서 그 쉽지 않을 삶을 격려하시고자 주신 선물이 바로 이 배롱나무인 것입니다.

 

지난 해 여름, 그 배롱나무는 백일이 넘도록 선홍색 꽃을 피워 나의 뜰을 채웠습니다. 벽돌 틈에 집을 지은 박새들이 새끼에게 먹이를 날라주기 전 꼭 거쳐가는 정거장 노릇도 했고, 마당에 놓은 토종벌통의 그늘 노릇도 해주었습니다. 무엇보다 흔들리는 마음 가누기 어려운 날을 겪을 때, 마치 다정하게 지켜보시며 용기를 주시는 스승의 모습처럼 나를 위로해주었습니다.

 

올 봄 스승님께 차마 고백하지 못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배롱나무가 죽고 말았습니다. 나무가 동해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첫 해에는 동해방지를 위해 나무를 짚으로 감싸주어 괜찮았는데, 올해는 이제 스스로 견딜 수 있겠지 생각하여 별다른 방한 대책을 세워주지 않은 탓이었습니다. 지난 겨울의 늦은 추위가 예년과 다른 탓도 있었지만, 남쪽이 고향이어서 추위에 약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둔 나의 잘못이 절대적이었습니다. 고민이 많았습니다. 나무에게도 미안하고 스승님께도 면목이 없었습니다. 해낸 생각이라고는 가을이 오면 새 배롱나무를 모셔다가 심어야겠지, 스승님 오셔서 이상하다 물으시면 무어라 말씀드리나

 

늦은 봄, 나무의 껍질이 들뜬 것을 보고 고무로 테이핑을 해주고 몇 달을 기다려보았지만 나무는 한 쪽의 잎도 내지 못했습니다. 나무가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줄기 옆에서 새로운 줄기가 힘차게 새 줄기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풀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붉은 색의 어린 줄기는 분명히 배롱나무의 그것이었습니다. “! 되살아났구나!!” 나도 모르게 소리쳤습니다. 반갑고 고맙고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또 저 나무 한 그루에게서 배웠습니다. 배롱나무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자신의 지상부 전체를 버리는 선택을 해야 했으나, 땅 속의 뿌리만은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견디기 힘든 추위가 계속되던 날, 나무는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몇 년을 일궈온 자신의 것 대부분을 버려야 했습니다. 뜰을 온통 붉게 물들여 벌을 부르고 새를 부르며 자신의 하늘을 열고자 했던 꿈을 지닌 백오산방 마당의 배롱나무에게 삶이란 그렇게 치열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더라도 자신의 뿌리에 숨겨놓은 꿈만은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연 속에는 버려서 다시 시작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버리되 뿌리를 지킬 수만 있다면, 떨구되 꿈을 버리지만 않는다면, 다시 꽃을 피울 수가 있습니다. 모든 생명의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IP *.20.20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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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10.07.08 04:19:07 *.197.63.9
그렇구나. 그런 일도 가능하구나. 나무도 제 존재의 이유를 함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깊이 새겨 생을 반전시키는 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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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
2010.07.08 04:31:11 *.174.185.34
눈물날 뻔 했다.
배롱나무가 원래 늦게 잎을 틔우긴 하지만 봄이 다 가도록 맘고생 좀 했겠수.

버려서 다시 시작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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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한
2010.07.08 09:24:20 *.41.37.43
그런것 같습니다. 버려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이 그때인가, 이것을 버리는것이 맞는 것인가 고민이 되기도 하지만,
버릴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단
확실히 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것, 고통을 수반하지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
또 한번 배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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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희
2010.07.08 21:09:59 *.106.63.52
요즈음
혼자 걸으면서 자주 웃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야   저에게 수상쩍은 눈길을 보내지만
굳이 '백오산방'을 설명할 필요도, 멀리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온 후배가
함께 '자연주의'연구모임을 만들자 제안했다는 것을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무.
나무는 저에게 삶이자 때로는  추억이지요.

 십수년 전
땔감 판것, 약초 판 것 모아서 진주 남강다리옆 서점에 가서
(전 중학교 때까지 방학 땐 약초꾼이자 나뭇꾼이었어요.)
'죄와 벌'그리고  아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네요.
이 책들을 사서
읽고 또 읽었더랬어요.
행복했지요.
나무와 약초를 판 돈으로 책을 샀으니 책에서도 나무냄새가 그리고 약초냄새가 물씬 풍겼습니다.

전 정말 나무를 보면 온갖 냄새가, 소리가 다 들린답니다.
나무를 보면서 생명에 대한 노래를, 찬사를, 또는 배움 같은것을 떠 올리기에 앞서
내 분신이고, 때로는 눈물이고,설움인 그냥 그 나무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런 저의 개인사 때문에 백오산방을 더 그리워하는지 모르겠어요. 

이 번 여름엔 백오산방을 찾아야 된다는
작은 의무감이 있습니다.

나를 지지해 주었고
대로는 위안과 설움을 감싸안아 준 그 나무들을 보듬고 있는 
그 곳 백오산방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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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10.07.09 01:21:41 *.67.223.107
도서관에서 <작가의 집>이란 책을 봤는데요.
프로방스를 사랑해서 고향을 떠나지 않고
그 땅과 나무와 언덕과 구름과 흙에 대한 글을 평생 썼다는 장 지오노의 집을 따라가 보았지요.
그때 잠시 백오산방의 하늘지붕이 있던 그 다락방이 생각났었어요.

학기는 이제 다 끝났지요?
그대의 글때문에 그대 생각이 마구 무찔러들고 ..그 나무도 보고싶고......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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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9 02:39:01 *.160.33.180
지난 겨울이 추워, 남쪽을 떠나  이주된  배롱 나무들이 여기저기 많이 죽어 서 있다.   
'생명은 결국 길을 발견한다' , 이 말이 맞구나.  죽은 줄 알았더니 아직 죽지 않았구나.  
죽지 않았으니 꽃을 피우겠구나.   내년이 아니면 그 이듬해에.   아니면 또 그 이듬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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