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무적의 영웅을 벨 칼은 영웅의 내부에 있다. 상승을 거듭 정점에 오른 영웅이 알게 되는 고질병이 하나 있다. ‘휘브리스(Hybris)’, 즉 ‘오만’이라는 이름의 병이다. ‘휘브리스’가 찾아들면서 영웅은 하강의 주기로 진입한다.”
- 이윤기,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3 : 신들의 마음을 여는 12가지 열쇠>

그리스 신화에는 많은 영웅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대부분 신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습니다. 영웅은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고, 신들의 초자연적인 조력에 힘입어 엄청난 모험을 완수합니다. 헤라클레스와 페르세우스 같은 진짜 영웅이 여기에 속하는데 이들은 ‘신들이 좋아하는 영웅’입니다. 그에 비해 영웅을 모방하는 ‘광대 영웅’은 험난한 모험의 과정을 견디지 못합니다. 이들은 영웅이 아님은 물론이고 그저 영웅이 될 욕망에 사로잡힌 ‘신들이 싫어하는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에서 광대 영웅이 아닌 진정한 영웅이 될 만 한 인물이 상승의 정점에서 추락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파에톤과 벨레로폰 같은 이들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신의 은총을 받다가 미움을 사게 되는 영웅(인간)’입니다.

파에톤과 벨레로폰은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파에톤은 태양신의 아들이고, 벨레로폰은 지혜의 여신인 아테나의 점지를 받은 영웅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최고의 기회에서 치명적인 과오를 저지르고, 상승의 정점에서 추락합니다. 이들은 왜 어떻게 추락하는 걸까요? 벨레로폰의 이야기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벨레로폰는 아테나 여신의 도움으로 하늘을 나는 말인 페가소스의 임자가 됩니다. 그는 이 비상한 말을 타고 광폭한 괴물인 키마이라를 큰 어려움 없이 처치합니다. 제공권을 장악한 그는 여러 전쟁에서 승리하여 천하무적이 되고, 마침내 한 나라의 왕이 됩니다. 거듭되는 승리와 사람들의 환호에 벨레로폰은 자만합니다. 인간을 넘어 영웅으로써 지상에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성취를 다 이룬 그에게 남은 건 신들의 세상입니다.

그는 페가소스를 타고 신의 세계에 오르기로 결심합니다. 최고의 영웅이라는 자만을 넘어 신의 경지를 탐하는 과욕에 빠진 것입니다. 그는 천마를 타고 신의 세상을 향해 날아올랐습니다. 제우스는 이 오만한 영웅을 가소롭다는 듯이 추락시켜 버립니다. 벨레로폰이 추락하기 시작한 지점은 상승의 정점입니다. 추락의 결과는 그래서 더 참혹합니다. 그가 추락한 곳은 ‘알레이온(방황의 들)’입니다. 벨레로폰은 겨우 목숨을 건지지만 장님에 절름발이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길만 골라 ‘방황’하다가 쓸쓸하게 숨을 거둡니다.

흥미로운 점은 제우스가 벨레로폰을 추락시킨 방법입니다. 제우스는 보통 때처럼 벼락을 쓰지 않고, ‘등에’ 한 마리를 만들어 페가소스에게 보냅니다. 등에는 말이나 소의 피를 빨아먹는 곤충입니다. 등에는 천마의 꼬리 밑에 붙어 피를 빨아 먹습니다. 페가소스는 몸부림을 치지만 등에는 떨어질 줄 모릅니다. 제우스의 등에는 보통 등에가 아니니까요. 결국 페가소스의 몸에서 떨어지는 건 등에가 아니라 벨레로폰입니다. 제우스는 페가소스를 죽이지 않고, 자기 곁으로 불러 벼락을 짊어지는 임무를 맡깁니다. 이것은 페가소스에게 잘못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벨레로폰의 성공의 기반은 페가소스입니다. 그런데 그는 페가소스의 힘을 자신의 힘으로 착각하고 오만에 빠졌습니다. 페가소스가 없는 벨레로폰은 추락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어로 ‘등에’는 ‘오이스트로스(oistros)’인데, 이 단어는 ‘광란’과 ‘과욕’을 뜻하는 라틴어 ‘오에스트루스(oestrus)’와 같다고 합니다. 의미심장하지요. 벨레로폰 이야기는 오만하면 추락한다는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


* 오늘 소개한 책 : 이윤기 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3, 웅진지식하우스,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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