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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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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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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7일 07시 34분 등록

“엄마..엄마...”

 

엄마는 칭얼대는 아이를 꼭 안더니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며 달래고 있습니다. 옆 병상에는 아이와 엄마가 함께 자고 있습니다. 보채는 아이를 달래다 같이 잠이 든 것 같습니다. 좁은 침대에 아이와 누워 있는 엄마의 얼굴에는 삶의 피곤함과, 아픈 아이에 대한 연민이 깃들어 있습니다.

 

5월이 되면 병원에서는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다양한 행사를 진행합니다. 올해도 원목실에서 수녀님들이 풍선과 솜사탕, 팝콘을 만들어 소아과 환자와 아이들에게 선물을 줍니다. 그나마 병원에서 가장 사람사는 느낌이 드는 곳은 소아과 병동입니다. 아이들은 아파도 그 자체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고, 젊은 엄마들이 간호를 하고 있어, 다른 병동보다는 활기를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픈 자녀를 둔 부모의 안타까운 마음을 접할 때마다, 저는 장영희 교수와 그녀의 부모님을 생각합니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장영희 교수는 생후 1년 만에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영문학자이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수필가였습니다. 그녀는 8년 동안 세 번의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2001년 유방암이 발견되어 치료하였으나 척추로 전이됐고, 다시 간으로 전이되어 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삶이 담긴 글을 통해 희망과 감동을 보여주었습니다. 세 번째로 암이 찾아왔을 때, 그녀는 좌절했습니다.

 

“그때 무척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다. 신에게 내가 불운의 대상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고, 내 자유의지와 노력만으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불공평하게 느껴졌고, 오로지 건강하다는 이유로 나에게 우월감을 느낄 사람들이 미웠고, 무엇보다 내가 동정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존심 상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녀를 버티게 한 건 삶에 대한 희망과 열정이었습니다.

 

“대학 2학년 때 읽은 헨리 제임스의 ‘미국인’이라는 책에는, 한 남자의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는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무서워 살금살금 걸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나는 그때 마음을 정했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나쁜 운명 , 좋은 운명을 다 깨워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살 것이다." 라고 “

 

그녀는 자신이 장애인으로 겪은 체험을 절절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며 오히려 비장애인을 위로했습니다. 절망에 빠졌던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글에 환호했습니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그녀는 암 환자와 장애우, 그리고 세상의 모든 상처받은 이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삶 자체가 기적이었지만, 기적 같은 삶을 살다 간 장영희 교수를 있게 한 장본인은,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였습니다. 장교수의 책에는 그녀가 열 살 때 ‘엄마의 눈물’ 이라는 제목으로 썼던 일기장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엄마가 연탄재 부수는 소리에 잠이 깼다. 살짝 문을 열고 보니 밤새 눈이 왔고 엄마가 연탄재를 바께쓰에 담고 계셨다. 학교 갈 때 엄마가 학교까지 몇 번이나 왔다갔다 하면서 깔아 놓은 연탄재 때문에 흰 눈 위에 갈색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위로 걸으니 별로 미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올 때는 내리막길인데다 눈이 얼어붙는 바람에 너무 미끄러워 엄마가 나를 업고 와야 했다. 내가 너무 무거웠는지 집에 닿았을 때 엄마는 숨을 헐떡거리고 이마에는 땀이 송송 나 있었다. 추운 겨울에 땀 흘리는 사람! - 바로 우리 엄마다.

 

그런데 나는 문득 엄마의 이마에 흐르는 그 땀이 눈물같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나를 업고 오면서 너무 힘들어서 우셨을까, 아니면 또 ‘나 죽으면 넌 어떡하니?’ 생각하시면서 우셨을까.‘엄마 20년만 기다려요. 소아마비는 누워 떡 먹기로 고치는 훌륭한 의사 되어 내가 엄마 업어줄께요.’

 

사회적 분류에서‘1급 장애인’이었고 평생 목발에 의지한 삶을 살아야 했던 그녀에게, 학교를 간다는 것은 일종의 전쟁이었습니다. 장 교수의 어머니는 두 다리와 오른팔이 마비 된 둘째 딸을 초등학교 3학년까지 업어서 등하교를 시켰습니다. 화장실에 데려가기 위해 두 시간에 한 번씩 학교에 와야 했고, 보조기 걸음을 놀려대는 아이들과도 대신 싸워야 했습니다.

 

진눈깨비 내리는 날이면 딸을 학교에 못 데려다 주게 될까 봐 새벽에 일어나 연탄재를 부숴서 집 앞 골목길에 뿌려놓았습니다. 비가 오면 한 손으로 딸을 받쳐 업고 다른 한손으로 우산을 든 채, 딸의 길과 방패가 되는 어머니의 하루하루는 슬프고 힘겨운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걸핏하면 수술을 하고 두세 달씩 입원해야 했던 병원생활, 장애를 이유로 시험보는 것조차 거부했던 학교들을 찾아가 시험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애원하며 매달렸습니다. 그것은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였고, 번역문학의 거두였던 아버지 장왕록 교수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렵사리 중학교에 입학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그야말로 산 넘어 산, 내가 대학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대학들은 어차피 합격해도 장애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내가 입학시험 치르는 것을 거절했다.

 

마침내 아버지는 당시 서강대학교 영문과 과장님이셨던 브루닉 신부님을 찾아갔고, 미국인 신부님은 너무나 의아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시고 “무슨 그런 질문이 있는가. 시험을 머리로 보지 다리로 보는가. 장애인이라고 해서 시험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라고 반문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두고두고 그때 일을 말씀하셨다. “마치 내가 말도 안 되는 것을 물어본 바보처럼 말이야. 그렇지만 그렇게 행복한 바보가 어디 있겠냐”고….

 

투병생활의 어려움을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척추에 방사선을 쏘이면 식도가 탑니다. 물 한 방울만 먹어도 마치 칼을 삼키는 듯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니, 목을 나긋나긋하게 돌리며,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있는 일, 온 몸의 뼈가 울리는 지독한 통증 없이 재채기 한 번을 시원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타계하기 직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은 “엄마” 였습니다.  병상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것도 엄마에게 쓴 편지였습니다.

 

“엄마, 미안해

이렇게 먼저 떠나게 되어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열이 펄펄 나는 아이의 이마에 손을 대고, 눈물로 한숨을 짓는 세상의 어머니들!

정상적이지 못한 아이를 업고, 타인의 눈총에 아랑곳없이 병원층계를 오르내리는 어머니들!

의사와 병원이 자식을 단념해도, 좌절과 포기라는 말이 옹색해져 버리는,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맹목적인 믿음을 보면서 깨닫게 됩니다.

 

기쁨 혹은 슬픔! 그 어떤 기억이든,

어머니의 존재야말로 사랑의 원천이고, 치유의 기적이 된다는 것을...

 

[p.s]

아래 링크는, 그녀의 책에서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문장이

마음에 닿아 만든 노래입니다.

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ukIpMaRhv8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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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7 22:38:11 *.42.252.67

우성아 아침부터 동영상보려고 시도하다 계속 못 보고 있어.

왜 안나올까? 나만 안나오나?

 

내일은 어버이 날,  네 글을 읽으니 토닥토닥 나를 키워주신 엄마를 위해

내일 재롱이 잔치를 해야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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