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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마음을

2006년 8월 30일 23시 23분 등록
값 비싼 불행

며칠 전 50대 초반의 한 여성과 짧은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직 독신이라는 그녀는 잘 가꿔진 외모에 세련된 의상을 걸치고 육중한 외제 승용차를 타고 나타났습니다. 그녀의 요즘 취미는 다도 배우고 즐기기, 가끔 서해안 근처에서 경비행기를 타며 하늘을 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녀는 자연을 찾아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했습니다.

나는 산과 강이 절묘하게 어울려 빚어내는 경치를 느끼도록 아주 느릿느릿 운전을 합니다. 수목원의 이 나무 저 나무를 쉬엄쉬엄 돌아 본 뒤, 어느 갤러리에 들러 차를 주문합니다. 갤러리의 정원에서 바라보는 강 위로 초가을 햇살이 아름답게 부서집니다. 그녀는 몇 분 째 전화기를 붙들고 사업 파트너와 고성으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습니다. 가슴이 답답해 옵니다. 나는 저 멀리 나무 아래 벤치로 자리를 옮기고 햇살을 받으며 눈을 감습니다. 새소리, 벌레소리, 바람소리가 가슴을 휘젓고 흩어지다가 다시 모여듭니다. 한참 뒤 눈을 뜨고 구름의 느린 변화를 보며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그녀가 있는 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녀의 통화는 이제 악을 쓰는 수준입니다. 상대 수화자에게 건네는 말은 더욱 거칠어졌고, 마침내 육두문자가 오가다가 전화가 끊깁니다. 나를 의식한 듯 미안해 합니다. 수익성 높은 프로젝트를 위해 상대 수화자에게 거액을 투자해 동업을 하는데 그가 꼼수로 자신을 기망하고 있다 합니다. 고생고생 돈을 벌었지만 수많은 상처를 지닌 이력이 그녀의 비싼 옷 사이로 배어 나옵니다. 그 상처의 진원지를 물으니 대부분 자신을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들 때문이라 합니다. 어느새 그녀의 처지를 들어주는 여행이 되어 버렸지만, 들어보니 결국 돈에 대한 욕망과 욕망이 힘을 겨루다가 관계와 마음에 상처를 쌓게 된 시간을 오랫동안 방치한 사람이었습니다. 혼자 사는 그녀의 한 달 기초(?) 생활비가 1천 만원이란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결국 그 수준을 유지하고 또 점점 더 높여가기 위해 그녀는 투쟁하듯 질주해야 하는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대부분의 우리가 그렇듯, 지금 여기에서 많이 멀어져 있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녀는 나와 함께 있는 몇 시간 내내 지속된 그 아름다운 초가을 햇살을 한 조각도 느끼지 못했고, 소나기를 맞아 짙어진 풀향기와 곱게 변한 흙 색깔, 그 위에 수줍게 피어난 쑥부쟁이의 요염함, 바람이 내는 평온의 소리, 구름이 만들어 내는 다양한 변화의 형상을 단 한순간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자연을 산책하고 다도를 즐기며 창공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보는 것을 즐긴다 했지만, 그녀는 자연이 순간순간 말거는 공짜의 행복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비싼 일상을 살면서도, 심지어 자연 속에 있으면서도 그녀는 지금 여기로 돌아오는 방법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서 비싼 불행이 느껴졌습니다.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호흡을 가다듬고 내게 물어 보았습니다.
나는 어떤가. 지금 여기에 잘 귀기울이며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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