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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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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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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17일 01시 39분 등록

herbook.jpg 

다시 청산도에 다녀왔습니다. 이번에는 한 여인과 함께 3 4일을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오늘은 그 여인의 이야기를 할 작정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모습의 그녀는 나보다 세 살이 많습니다. 이제 쉰 살이 몇 해 남지 않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소녀적 감성이 가득합니다.

 

우리는 이틀간 슬로시티로 지정된 완도군 청산도의 아름다운 길을 주의 깊게 걸었습니다. 완도군이 슬로길이라고 명명한 청산도의 도보 일주 코스 주변에 존재하는 생태와 문화 자원을 조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슬로길에서 만나는 청산도의 생태 문화 도감’(가제)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함께 수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길을 걷고, 약간의 길은 차를 타고 이동했는데, 매 순간 그녀의 분별력은 놀라웠습니다. 그녀는 가는 곳에서 만나는 모든 식물에 대한 분류를 척척 해냈습니다. 마을의 수채에서 자라는 식물, 갯가에서 자라는 식물, 큰 산불이 난 뒤 복원되고 있는 숲에서 자라는 야생초들, 마을 주민들의 집과 절에서 자라는 식물 대부분을 줄줄이 읊으면서 메모하였습니다. 해질 무렵에는 이동하는 차 안에서 스쳐가는 길 섶 식물들을 재빨리 메모하고 있었습니다. 식물의 이름을 분별하는 식물 분류에 관한 한 그녀는 거의 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었습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두 권의 도감을 펴냈고, 식물에 관한 서너 권의 책을 쓴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신춘문예로 등단한 동화작가로 몇 권의 동화책을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분야에서 그녀는 이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문가의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도 오랜 시간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전 그녀의 프로필을 본 적이 있는데, 서른 여덟 살까지 그녀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 주부였습니다. 어떤 계기였는지 모르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매주 수요일을 꽃요일로 정하고 마음 맞는 주부들과 함께 들풀을 찾아 숲에 들기 시작했습니다. 수년 동안 무수한 풀을 만나고 그 이름 하나하나를 마음으로 기억하던 그녀는 드디어 <풀꽃 친구야 안녕>이라는 책을 냅니다. 이어서 매주 찍고 모아온 풀꽃 사진과 지식을 엮어 <주머니 속 풀꽃도감>을 펴냈습니다. 다시 꾸준한 꽃 모임 중에 나물 캐는 할머니들을 만나 그분들의 지식과 지혜를 토대로 <주머니 속 나물도감>을 펴냈습니다.

 

숲 공부를 본격 시작했을 때 나는 그녀가 펴낸 풀꽃도감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만난 적 없지만 그녀가 나의 풀꽃 스승인 셈이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직접 만난 것은 내가 <숲에게 길을 묻다>라는 책을 낸 뒤였습니다. 그녀가 꽃모임을 갖고 있는 이들과 함께 나의 산방을 찾아주었을 때였습니다. 책으로 만나던 스승이 졸저의 독자로 집을 찾아주었을 때, 나는 무릎을 꿇고 그녀가 가져온 나의 책에 사인을 했고, 내가 가진 그녀의 도감에 무릎을 꿇고 사인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펴낸 책이 담고 있는 위대한 지적 자산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었습니다.

 

여전히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는 여인이지만, 그녀는 이미 위대함의 강을 건넌 사람입니다. 전국 곳곳에서 그녀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거의 매년 한 권의 책을 쓰고 있습니다. 여전히 그녀는 주부요 며느리요 어머니의 삶을 살고 있지만, 그녀는 결코 그럭저럭 평범한 안락을 좇는 여인의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평범한 삶 속에는 그것으로 묻어버릴 수 없는 위대함이 항상 함께 하고 있습니다. 나흘간 함께 한 시간에서 나는 그녀의 평범함을 굴복시킨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좋아하는 것이요 또한 꾸준한 것이었습니다. 누구보다 풀꽃을 좋아하고 누구보다 꾸준하게 그들의 모습에 귀 기울이는 그녀의 삶이 그녀를 위대한 여인으로 바꿔놓은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최근 도감을 펴낸 많은 사람들이 그녀와 같은 비전공자입니다. 좋아하고 그 좋아하는 것에 꾸준한 것의 위대함! 어떤가요? 해보고 겪어보고 싶지 않나요?

IP *.20.202.218

프로필 이미지
햇빛처럼나무처럼
2010.06.17 13:14:42 *.190.122.192
지난 소풍때 말씀하셨던 재미있는 프로젝트 이야기군요.
그 결과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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