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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마음을

  • 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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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29일 00시 01분 등록

몇주 전부터 산책을 시작했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저녁을 먹고 2~3시간 집에서 가까운 한강변을 혼자 걷습니다. 운동 삼아 시작한 것이었지만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요즘 새로운 자극을 얻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습니다. 산책을 시작하면서 몇 가지 걱정꺼리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매일 같은 길을 걸으면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실제로 산책을 해보니 기우였습니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같은 곳을 걸어도 매일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그날그날의 풍경과 느낌이 다릅니다.

며칠 전에는 우연히 수령(樹齡)이 400년을 훌쩍 넘은 보호수(保護樹)를 발견했습니다. 이 동네에서 30년 넘게 살았고, 정기적으로는 아니지만 여러 번 다녀본 길에서 그 나무를 처음으로 발견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단박에 범상치 않은 모습과 기운을 가진 나무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태껏 몰랐다는 게 이상할 정도였습니다.
<걷기예찬>을 쓴 다비드 르 브르통은 “산책은 친숙한 것의 낯설음을 고안해낸다. 산책은 디테일들의 변화와 변주를 민감하게 느끼도록 함으로써 시선에 낯섦의 새로움을 가져다준다”고 말합니다. 그의 말이 맞았습니다. 보행은 ‘넓은 도서관, 매번 길 위에 놓인 평범한 사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도서관, 우리가 스쳐지나가는 장소들의 기억을 매개하는 도서관’이었습니다.

혼자 걸으면 심심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했습니다. 이것 역시 아니었습니다. 걷다보면 과거의 어떤 기억이 떠오르곤 합니다. 평소에는 거의 자각하지 못했던 기억이 대부분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리듬에 맞춰 잠겨 있던 장면들이 하나씩 펼쳐집니다. 그 기억에 어떤 때는 기쁘고, 어떤 때는 아련한 느낌이 들고, 아쉬움으로 번지는 장면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기억이든 결국 미소 짓게 됩니다. 세월이 기쁨으로 가득한 기억은 따뜻한 햇살처럼 잔잔하게 순화시켜 주고, 또 다른 기억의 슬픔은 어둠 속의 별처럼 반짝이게 만들어주었나 봅니다. 처음에는 왜 지금 그런 기억들이 나도 모르게 등장하는지 희한했습니다. <걷기예찬>의 한 구절에서 의문이 풀렸습니다.

“길을 걷는 것은 때로 잊었던 기억을 다시 찾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리저리 걷다보면 자신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여유가 생기게 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걷는 것에 의해서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 트이고 추억들이 해방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걷는 것은 죽음, 향수, 슬픔과 그리 멀지 않다. 한 그루 나무, 집 한 채, 어떤 강이나 개울, 때로는 오솔길 모퉁이에서 마주친 어느 늙어버린 얼굴로 인하여 걸음은 잠들어 있던 시간을 깨워 일으킨다.”

오래 걸으면 에너지가 빨리 소진되지 않을까하는 염려도 있었습니다. 미리 걱정을 많이도 하지요? 요즘 제가 이렇습니다. 계속해서 에너지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기에 제게는 작지 않은 걱정이었습니다만 이것 역시 기우일 것 같습니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걸을수록 에너지가 활성화되고 충전되는 느낌이 듭니다.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생각이 단순해지는 것 같습니다. 딱 맞는 표현을 찾을 수는 없지만 마치 명상을 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 느낌은 부르통의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 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 든다. 그 명상에서 돌아올 때면 가끔 사람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 숲이나 길, 혹은 오솔길에 몸을 맡기고 걷는다고 해서 무질서한 세상이 지워주는 늘어만 가는 의무들을 면제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덕분에 숨을 가다듬고 전신의 감각들을 예리하게 갈고 호기심을 새로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걷는다는 것은 대개 자신을 한곳에 집중하기 위하여 에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소로우가 왜 산책을 즐겼는지, 그가 산책에서 느꼈던 희열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산책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혼자 계속 걷다보면, 어쩌면 제 속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며 묻혀있던 아름다운 내면의 길 하나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상의 구불구불한 길을 마음으로 더듬어 가는 산책은 부르통의 말처럼 ‘외면의 지리학이 내면의 지리학과 하나가’ 되는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sw20100628.gif
* 오늘 소개한 책 : 다비드 르 브르통 저, 김화영 역, 걷기예찬, 현대문학, 2002년
* 홍승완 트위터 : @SW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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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10.06.30 10:32:38 *.108.80.26
확인할 수 없는 내 감수성 탓이겠지만,
어쩐지 위 글에서 차분한 침잠을 너머 쓸쓸함이 느껴지네?^^

나도 하루에 한 시간은 걷는데,
글쎄 벚나무 이파리가 몇 개씩 벌써 낙엽이 지더라구.
여름의 한복판에 이미 가을이 들어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각별하게 좋아하지 않더라도 친근감이 느껴지는 연예인의 속성상
극단적인 선택을 한 연예인의 소식은 늘 충격적인데, 
그 소식에 접하며 다시 한 번 산다는 것의 의미와 방법을 새겨보는 아침이야

우리들 연구원에겐 읽고 쓴다는 것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어.
내가 처져 있고 생각이 많으니까 승완씨 글을 그렇게 읽었을 텐데,
굽이굽이 시도때도 없는 의문과 처짐과 혼란과 쓸쓸함 그 모든 것을
글쓰기로 돌파해야 하리라,
그것은 내가 생에 가진 단 하나의 의무이자 욕심,

댓글을 쓰다 보니 또 한 번의 완만한 슬럼프를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네.
혹시 내가 승완씨 글에서 받은 느낌이 사실이라면,
승완씨 또한 그럴 수 있기를 마음으로 빌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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