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오늘의

마음을

마음을

  • 승완
  • 조회 수 3869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3년 12월 10일 07시 54분 등록

컴퓨터로 글을 쓰다 보면 프로그램 오류나 실수로 글이 통째로 날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편지’를 쓸 때도 몇 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기운이 쫙 빠지다가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결국 투덜대며 다시 씁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쓴 글의 품질이 더 좋을 때가 많습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닌가 봅니다. 소설가이자 번역가 이윤기 선생도 그런 일이 여러 번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원고를 날려먹고 다시 쓴 글의 품질이 훨씬 좋았다고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에게 상을 안겨준 작품들,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대부분의 작품들은 ‘날려먹기’와 ‘다시 쓰기’의 아픈 경험과 관련이 있다.”

 

이런 경험이 쌓이다 보니 그는 ‘빛나는 승리는 바로 실패와 좌절의 순간이 피어낸 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일까요? 원고 날리고 다시 쓴 글이 더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의 경험을 반추하며 길어 올린 생각은 이렇습니다. 글을 다시 쓰려면 날라 간 글을 기억해내기 위해 자연스럽게 최대한 애쓰게 됩니다. 그 과정은 날아간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다시 쓰는 과정에서 기존의 글을 반추하고, 글감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거나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전과는 다른 참신한 접근법을 떠올릴 수 있고, 기존 글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채우거나 다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쓰는 과정은 기존 글을 바닥부터 철저하게 생각하고 고쳐 쓸 수 있는 기회가 되는 셈입니다.

 

1991년 이윤기 선생은 돌연 미국으로 떠납니다. 마흔다섯의 나이에 백 권을 훌쩍 넘는 역서를 펴내며 번역가로 잘나가고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겉모양새는 미시건 주립대학교의 ‘방문 학자(Visiting scholar)’ 자격이었지만 고정적인 월급은 없는 자리였습니다. 아파트 전세금을 밑천삼아 온 가족이 떠난 뒤늦은 유학 생활은 집시 생활이 따로 없었다고 합니다. 현지 유학생들은 서로 대물림하며 써온 부엌 용품과 작은 가구들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마음은 고마웠지만 “한국에서라면 눈길조차 주기 싫을 정도로 낡고 못생긴 물건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새로운 세계에 새롭게 적응’하기 위해 번역 일을 줄이고, 책을 읽고 영어 입말을 배우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는 당시 생활을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나는 바닥부터 박박 기었다.”

 

1991년을 기점으로 그의 삶은 번역에서 소설로 옮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그를 ‘번역가 이윤기’가 아닌 ‘소설가 · 번역가’로 인식하게 만든 첫 장편 소설 <하늘의 문>, 중편 소설 <나비 넥타이>, <햇빛과 달빛> 등이 미국 생활 중에 나왔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윤기 선생은 1991년 이후의 자기 삶은 “‘외국살이 이전’과 ‘외국살이 이후’로 나뉜다”면서 “아무래도 나는 외국살이 덕분에 소설가로 돌아올 수 있었던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흐르는 물’이 주는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물은 고여 있으면 썩는다. 흐르려면 바닥을 기어야 한다. 사람 또한 그렇다. 사람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고 강조합니다. 맹자(孟子)에 나오는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라는 문장과 일맥상통합니다. 또 그는 “물은 석자만 흘러도 스스로를 맑힌다”는 점도 함께 강조합니다. 고인 물은 쉽사리 탁해지지만 흐르는 물은 정화 능력이 있습니다. 잘 흐를수록 맑습니다.

 

사유와 글쓰기, 그리고 삶도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나는 바닥부터 채우고 있는가? 글이 쉽게 써지기만을 바라고 있는 건 아닌가? 쉬이 일을 풀 수 있는 편법이나 지름길을 찾고 있는 건 아닌가? 내 정신의 물결은 맑은가? 아집과 선입견으로 탁해진 눈으로 사물을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닌가?

 

살다 보면 고비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고비는 고개입니다. 낮기만 한 곳이 아니고 높기만 한 곳도 아닙니다. 높이와 깊이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넘기 어려운가 봅니다. 또한 바로 그래서 고개를 넘은 사람은 전보다 깊어지고 높아지나 봅니다.

 

밑바닥에 있는 사람은 굴러 떨어질 곳이 없습니다.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바닥부터 채워야 합니다. 높이를 가지기 위해서도 바닥부터 채워야 합니다. 존재가 성장하고 삶이 성숙하기 위해서는 바닥 체험, 다시 말해 자기 존재의 바닥을 직면하고 바로 거기부터 채워나가는 체험이 필요한 듯합니다.

 

20131203-1.jpg 

이윤기 저,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웅진지식하우스, 2013년

 

 

IP *.34.180.245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