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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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도 알듯이 한때 나는 침묵을 힘들어한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와 마주한 자리에 오랫동안 침묵이 흐르면 나는 그 시간을 혐오했습니다. 아마 침묵 사이에는 단절이 놓여있다고 여겼나 봅니다. 침묵은 늘 서먹함이요 어색함의 반증으로 생각하는 강박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의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침묵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밭 일을 하는 시간에도, 숲을 거니는 시간에도, 운전을 하고 장이 서는 날 읍내를 거니는 시간에도, 그리고 산방 거실에 앉아 어떤 작업을 하는 시간에도… 나는 항상 침묵에 휩싸여 있습니다. 전화가 걸려오지 않는 어떤 날은 온종일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지내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어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변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내가 자신에게 소원해진 것이 아니냐는 서운함을 비추기도 합니다. 다소 말이 없어진 나를 만나면 그대도 서운한지요?
예전의 나처럼, 그대가 사람 사이를 흐르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이라면 나는 그대를 5월과 6월의 숲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5~6월의 숲에 들어 나무와 풀꽃이 어떻게 대화하고 사랑을 나누는지 보여주고 싶습니다.
4월의 숲은 현란합니다. 4월에 피는 온갖 꽃들은 화려한 빛깔로 매개자를 유혹하는 소통법을 사용합니다. 4월의 대표주자인 진달래와 산벚과 복숭아 모두가 붉은 빛깔을 세워 매개자와 소통합니다. 그들이 말을 건네는 방식에는 나마저 눈을 빼앗기곤 합니다. 4월, 그들에게서는 마치 현란한 언변술을 보는듯 합니다.
하지만 5~6월의 숲에서는 좀체 눈에 띄는 꽃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작 흰빛의 꽃들만이 두드러질 뿐입니다. 찔레와 아카시가 그렇고, 층층나무와 말채나무도 그렇습니다. 때죽과 쪽동백도 마찬가지군요. 나머지 대부분의 꽃들은 짙어진 녹색에 묻혀 잘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6월의 숲에 들면 나는 그들이 건네는 말에 홀려 홀라당 자주 마음을 빼앗기고 맙니다. 그렇다면 왜 화려함이 사그라진 5~6월의 숲에 마음마저 빼앗기게 되는 것일까요?
그대의 짐작이 맞습니다. 바로 ‘향기’ 때문입니다. 5~6월의 숲은 향기로 소통하는 대화법을 익혔습니다. 이미 녹음이 짙어진 상태이므로 더 이상 현란함을 갖춘 대화로는 매개자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기 어렵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지요. 주변의 소란을 뚫고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방법으로 그들은 향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꽃과 수분 매개자들의 대화는 항상 침묵이었습니다. 특히 복잡함이 커지는 시간이면 그들은 향기를 담은 침묵으로 그들과 소통해 왔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대화법이 향기를 담은 침묵임을 그들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침묵 속에도 5월의 숲을 닮은 그윽한 향기가 담겼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대화법! 그것으로 그대의 심장 한 복판을 헤집고 들어가 그대가 내게로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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