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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마음을

  • 이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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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12일 11시 36분 등록
5월 7일과 8일

이틀 동안 인터뷰를 했다. 하루는 강원도 횡성에서, 하루는 강원도 38선 경계지역에서. 이틀 다날씨가 좋았고, 여행하기에 좋은 날이었다. 인터뷰를 하러 가는 길은 아름다웠고, 인터뷰 한 사람들 역시 아름다웠다. 그들은 자신의 문법대로 세상을 이해하고 호흡하는 사람들이었고, 자신이 가는 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답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내 믿음을 삶으로 확증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건 신나는 일이다. 답이 없어서 오히려 즐거운 삶,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내가 살아내야 할 몫이라는 것에 충실한 사람들. 인터뷰를 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엔 언제나 활력이 넘친다.

나에게 인터뷰는 여행이다. 대상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들의 삶을 탐험하는 여행. 강원도로 이틀 인터뷰 여행을 오가는 길에 나는 인터뷰의 또 다른 가능성과 만났다. 이렇게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내 꿈 하나를 저절로 이루게 되는 셈이다. 그 동안 시답잖게 외국으로 돌면서 정작 한국의 아름다운 풍광들은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토종인 나는 우리 풍광 속에 서있을 때 가장 완벽한 충일감을 느낀다는 것을. 이렇게 전국을 찍고 다니며 인터뷰하는 동안 나는 우리 국토의 속살 곳곳을 이야기와 함께 기억하게 될 것이다. 내 인터뷰에 경계가 있을 리 없으니, 이런 식으로 나라 밖에도 점을 찍기 시작하면 온 세상이 내 인터뷰의 무대가 될 것이다. 사람과 장소가 함께 하는 여행, 피상적으로 훑기만 하지 않고, 내 인생의 일부로서 피와 살이 되는 여행. 나는 언제나 길 위에, 사람 속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내 책의 소재가 될 것이다. 아, 생각만으로도 행복하다.

5월 11일

며칠 사이에 기분이 바닥으로 내려갔다. 지난 주말 만났던‘제로’에게서 배운 대로 순간순간 감정 내려놓기를 연습했지만 한 번 가라앉은 기분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당연하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의 혼란이 아니기에. 내게는 아직 개선하지 못하고 삶의 가시로 가져가는 한 가지가 있다. 그 가시를 제거하지 않고는 완벽하게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내 인생과 타협하고 있다. 이렇게 가끔 한 바탕의 홍역을 치르고나면 잊고 있던 그 가시가 돋아난다. 그럴 땐 인생이 한없이 힘들어진다. 비가 그친 오후, 광교산에 올랐다. 오랜만에 가보는 산이라 길을 찾는데 한참을 헤맸다. 헤매다 그냥 앞에 난 낯선 길을 가보기로 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다소 완만한 길이었다.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은 있었지만 그래도 그 길을 따라가보기로 했다. 평소 같았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남들이 많이 가는 익숙한 길을 반드시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버려진 길이 나 자신의 모습 같았고, 결과적으로 나는 그 숲에서 위로를 많이 얻었다. 어느 때보다도 천천히 걸으며 물에 흡족히 젖어 떠는 나무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5월12일

어제의 등반으로 조금은 심기가 일전된 김에 한 가지 다짐을 새롭게 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회복하는 것! 그 동안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온 (늦게 자는) 습관 때문에 아침 리듬이 무너졌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앉아도 머리가 개운치 않으니 시간의 효율이 한없이 떨어졌다. 거기에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또 다른 한 가지는 모닝페이지를 대하는 내 마음이 이전처럼 간절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래 늘 초심일 순 없다. 그래도 준비된 새 사람들이 언제나 내 곁으로 온다는 사실이 자극이 된다. 그들의 초심은 바로 나의 것이었다. 아직 내 안에서 그걸 뜨겁게 원한다. 어떤 일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 그 안에 열정과 사랑이 없는 것, 호기심은 마르고 감각은 무디어지는 것,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들이다. 차가운 아침 공기에 대고 외친다. “좋은 하루 나쁜 하루는 없어, 그건 내가 그렇게 만드는 거야. 나쁜 하루는 내가 그렇다고 인정할 때만 나쁜 하루인 거야. 잠을 자고 일어나면 백지처럼 새로 채워야 할 하루가 앞에 펼쳐져 있다는 거, 얼마나 감사한 일이니. 어제의 일로 다시 먹을 뿌리며 하루를 시작하는 건 가장 어리석은 일이지,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 아니라 완벽한 새 날인 것을 잊지 마!”

그런 내가 바로 또 넘어졌다. 오늘은 아침 7시가 되도록 밖이 많이 어두웠다. 어제 시작된 비가 아직 멈추지 않고 있었다. 내 침대에서 자고 있는 둘째를 깨웠다. 대답만 ‘응응’할 뿐 일어날 의지가 전혀 없는 아이를 바라보자니 속이 조금씩 끓어올랐다. 그 애는 시험 스트레스가 심하다면서도 잘 건 다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한다면서도 밤 늦게 자는 일을 절제하지 않았다. 잔소리를 안 하려고 참고 있었지만 그간 그 애의 행동은 모두 내 마음에 쟁여져 있었던 것인가. 오늘 아침, 생각과는 달리 내 입에서 나가는 소리들이 곱지가 않았다. 식탁에 아이를 앉혀 놓고 ‘좀 일찍 일어날 수 없냐’고 한 마디 했다가 기어코 말싸움이 벌어졌다.‘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라’라는 말 한 마디가 어찌 아이를 그렇게 자극할 수 있으랴만, 그 애는 이미 내 목소리 톤과 그 속에 담긴 자신에 대한 불신을 읽고 기분이 틀어져버린 것이다. 그래도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꼬락서니라니. 그 애는 엄마가 어른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듯했다. 한 마디도 물러서지 않고 어미 감정을 흔드는 말들만 골라 던졌다.‘둘째와는 뭐가 잘 맞지 않는다'는 이 근거없는 믿음을 어찌하면 깰 수 있을까. 좀 근사한 엄마이길 바라는 내 소망은 오늘 아침에도 무참히 깨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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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장영희 교수님의 부고를 듣고 어제 오늘 마음이 무겁습니다. 소아마비로 평생 몸이 불편했던 그녀는 다시 맞딱드린 암의 고통과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늘 삶과 희망의 편에 서서 가르치고 쓰는 일을 사랑했습니다. 나는 오늘 작가란 어떤 삶을 사는 자이어야 하는지, 저 세상으로 가고 나서 더 크게 말하는, 아름다운 그녀에게서 배웁니다.
IP *.96.1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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