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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마음을

  •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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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3일 07시 33분 등록

 

어제 오후 3시쯤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번호가 63으로 시작되는 걸 보니 마닐라에서 온 국제 전화다. 그곳 인터내셔널 스쿨에 다니는 막내가 수업 끝나자마자 전화하나 보다 싶어 반갑게 받았는데, 어른 남자 목소리다.

월리(막내의 닉네임) 어머니시죠, 저는 닥터 냅입니다.

그가 닥터라고 했을 때 학위 타이틀을 앞에 붙이는 단순한 교사일 거라고 빨리 추정을 했어야 하는 건데!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닥터=의사로 인식한 나는 이미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술이 새파래진다. 그 시간에 학교 의사 선생님께서 직접 국제전화를 하는 거라면 그건 우리 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단단히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School Doctor? Did something happen to my son?

예의를 차릴 겨를도 없이 재빨리 한 마디 내 뱉었다.  

No, no! 

Is he now in school clinic, isnt he ?

다시 이렇게 되묻고 있는 나는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 있다.

I am not a doctor of medicine, but a doctor of education.

휴우, 그는 학교 의사가 아니고 학교 입학처의 디렉터라고 했다. 일단, 안도한다. 막내가 아프지만 않다면 어떤 얘기도 침착하게 들을 수 있다. 그는 우리애가 금지된 이상한 쇠붙이를 학교에 가져와서 아이들에게 위험한 장난을 쳤다고 했다. 학칙에 의해 하루 정학(suspension)을 줄테니 양해해 달라고.

월리 가디언되시는 분과 연락이 안되어서 이렇게 어머니께 직접 국제 전화를 하는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애가 학교에 가져간 물건은 쿵후할 때 쓰는 조그만 물건이었다. 멋있어 보여서 친구들에게 자랑하려고 가져간 것이라고 한다) 그 애의 가디언인 선교사님께 전화를 걸어 사정을 알리고 잘 대처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저녁 7시쯤 월리에게서 직접 전화가 왔다.

엄마 놀랬지, 그리고 실망했지?

아니, 네가 많이 아픈 줄 알고 놀랬어. 건강하면 돼, 괜찮아.

나 선생님이 엄마한테 전화할 때 옆에 있었어.

그랬구나. 내일 상담할 때 잘 말해서 정학은 안받게 해. 다른 벌을 받겠다고 해. 그런 일로 학교 하루 쉬는 건 좀 그렇잖아!

알았어요.

 

오늘 나는 내 불안의 정체 하나를 다시 확인했다. 아이들의 안전과 관련된 불안은 엄마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내 자식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비는 엄마들의 마음은 평생 동안 져야할 짐인 것이다. 요즘 교회에 안 나가는 나는 오랜 교회 생활로 몸에 밴 정죄감 때문에 약간 시달리기도 한다. 그 정죄감과 아이들의 안전이 연결될 때 나는 괴롭다. 부모가 가장 감당하기 힘든 건 부모의 잘못 때문에 아이들이 힘들어질 때이다.

 

오늘 아이에게 아무 일도 없는 것이 감사하다. 눈에 안 보인다고 별로 걱정을 안하고 지냈는데, 이 일로 인해 그 애가 건강하게 잘 지내주는 것, 내가 없어도 그곳에서 잘 살아주는 것, 그리고 선교사님께서 늘 그 앨 잘 돌봐주시는 것, 그런 작은 모든 일들이 새삼 다 감사하게 된다.

 

이 편지를 쓰다 보니 막내가  너무 보고 싶다. 그 애와 팍상한에서 찍은 사진을 책상 위에 올려 놓는다. 인상 좋은 그 애가  나를 보고 웃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스윗한 나의 막내!

IP *.240.107.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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썽이리
2009.02.03 11:44:54 *.48.246.10
살아갈수록, 때론 그저 흔한 일상이, 그저 흔하게 벌어지며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깨닫고 있습니다. 엊그제 "TV 다큐 3일"을 보니 경북영양의 오래된 시골정류소에서 색바랜 이빨처럼 누런 차표를 파시는 할아버지께서 그러시데요. "효도할려고 애쓰지 말고 불효만 안하면 된다" 부모의 마음이겠지요? 가슴 쓸어내리지 않고 객지에서 무탈하게 잘 살면 그게 좋은 것이지요. 시골 부모님과의 짧은 통화끝에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끝말씀 "단디해라" 4마디안에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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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친구
2009.02.03 21:37:55 *.201.227.165
보고 있으면 그리움이 사라지고, 없으면 보고 싶고 해 맑은 아이들 웃음이 떠오릅니다.. 왜 고요한 물결이 치고 있을때는 고요함이 좋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풍파가 있고 나서야 알게 될까요.. 이게 모순인것 같아요 그 모순을 통해서 점점 삶의 의미를 하나 알아가는것 같습니다.. 소은님의 글을 통해 제 딸에게 더 다감한 아빠가 될수 있을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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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5 09:16:17 *.162.198.91
정말 아이들의 안전에 대해 엄마로서 느끼는 불안감은 많은 수양을 해도 담담해질 수 없는 부분인 거 같아요. 완전 공감!! 그리고 안전하다는 것에 대해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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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엽
2009.02.09 14:57:07 *.165.140.205
"오늘 나는 내 불안의 정체 하나를 다시 확인했다. 아이들의 안전과 관련된 불안은 엄마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내 자식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비는 엄마들의 마음은 평생 동안 져야할 짐인 것이다. 요즘 교회에 안 나가는 나는 오랜 교회 생활로 몸에 밴 정죄감 때문에 약간 시달리기도 한다. 그 정죄감과 아이들의 안전이 연결될 때 나는 괴롭다. 부모가 가장 감당하기 힘든 건 부모의 잘못 때문에 아이들이 힘들어질 때이다."

-> 정말 공감이 갑니다. 몸에 밴 정죄감. 그 정죄감과 아이들의 안전이 연결될 때의 괴로움. 부모의 잘못때문에 아이들이 힘들어질 때. 부모가 되고나니 이제 하나하나 이해가 됩니다. 왜 부모님께서 저에게 그러셨는지를. 세월이 주는 깨달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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