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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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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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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29일 05시 59분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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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고난을 자기 편으로 끌어당겨 삶의 발판으로 삼는 생명들이 있습니다. 나는 요즘 그것을 이 숲의 개암나무에게서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 지역을 포함한 몇몇 지방에서는 개암나무의 열매를 ‘깨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견과(堅果)인 그의 열매를 깨물어 속 안의 씨앗을 먹어보면 그 고소함이 참으로 일품인 열매를 맺는 나무입니다.

개암나무는 수수한 꽃을 피우지만 자기만의 세상을 정교하게 열어가는 생명입니다. 녀석은 뭉툭한 꼬리모양의 꽃차례(尾狀花序)로 수꽃을 피웁니다. 가지 끝에 피는 붉은 색의 아주 작은 암꽃은 수수한 듯 매혹적입니다.(사진 참조) 이 나무는 수꽃차례 하나에 대략 4백만 개 정도의 꽃가루 알갱이를 담습니다. 나무 한 그루가 만드는 꽃차례가 수천 개에 이르니 가히 대단한 수의 정자를 생산하는 나무입니다. 이처럼 아주 많은 양의 수꽃가루를 생산하는 이유는 이들이 바람을 매개로 섹스를 하는 생명, 바로 풍매화(風媒花)이기 때문입니다. 풍매화이면서도 이들의 암꽃은 다른 개암나무로부터 날아온 수꽃가루만을 받아들여 수분을 합니다. 엄마나무에게서 나온 수꽃가루는 일절 받아들이지 않는, 즉 근친상간을 불허하는 혈통 있는 나무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수정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엄청난 양의 꽃가루를 바람에 방사합니다.

개암나무에게 바람은 기회이자 제약입니다. 이들은 태풍처럼 지나치게 센 바람도 피해야 하고, 지나치게 여린 바람도 피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센 바람도, 약한 바람도 모두 수꽃가루가 암꽃을 만나 은밀한 사랑을 나누는 것을 어렵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이들은 다른 식물들이 잎을 마구 피워냈을 때 그 잎에 자신의 꽃가루가 걸려 수정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일도 막아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약조건을 알고 있는 개암나무는 그의 꽃을 대략 3월에 피우는 것으로 과제들을 해결했습니다. 3월의 숲은 아직 나목(裸木)들 뿐입니다. 3월은 다른 식물들의 잎이 거의 없어 장애물의 방해를 줄일 수 있는 때입니다. 또한 3월은 태풍을 피할 수 있는 계절입니다. 하지만 조기개화를 선택한 그는 또 다른 고난을 넘어야 합니다. 겨울의 추위가 그것입니다. 겨울이 끝나자마자 꽃을 피우기 위해서 개암나무는 이미 겨울이 오기 전인 지난해에 수꽃 주머니를 만듭니다. 강추위와 모진 바람으로부터 자신의 희망인 꽃 주머니를 지켜내는 것은 그들에게 힘겨운 일이고 도전이고 고난입니다.

하지만 개암나무는 이 고난을 끌어안고 어루만져 자신의 희망으로 만든 생명입니다. 그들은 혹독한 추위를 피하기 보다 오히려, 그 추위가 자신들의 꽃가루를 냉동 처리하는 시간이 되도록 활용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꽃가루알갱이가 어느 정도의 단백질과, 지방과 전분, 그리고 다양한 화합물을 모으고 섞어 추위에 맞서도록 훈련해왔습니다. 어느 생태학자에 따르면, 개암나무는 영하 십 몇 도 이하의 매서운 추위를 겪지 않고는 개화할 수 없는 꽃으로 만들어냈습니다. 매서운 추위라는 고난을 자신들의 꽃을 피우는데 필요한 담금질로 삼아낸 것입니다. 마침내 개암나무의 수꽃은 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있고 나서야 개화하는 꽃이 되었습니다. 고난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고난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생명들에게 고난은 이미 희망의 배아(胚芽)일 따름입니다.

아직 숲은 생명들의 담금질로 가득할 뿐입니다. 하지만 입춘이 머지않았습니다. 이제 곧 고난을 담금질로 바꾸어낸 뒤에 피어나는 수많은 꽃들의 사랑을 보게 되겠지요? 오늘도 나는 산중에서 그들을 그리워합니다.

IP *.142.18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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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9.01.29 13:00:38 *.248.75.5
'고난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생명들에겐 고난은 희망의 배아(胚芽)일 따름'이란 말 새기고 갑니다. 아마도, 희망이란 원래부터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는 태어날 수 없는 숙명을 가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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썽이리
2009.01.29 14:45:32 *.48.246.10
이곳 빌딩숲속에서도 개암나무들을 가끔 만납니다. 고난을 견디고 우뚝 선 사람(삶)이 희망인 이유를 알겠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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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아
2009.01.29 21:34:24 *.253.249.88
"蒙 亨 初筮 告 再三 瀆 瀆則 不告 利貞"
그대의 순수한 맘이 글속에 묻혀있고, 아무도 찾지 않는 만중운산(萬中雲山)에 지는잎 부는바람을 벗삼아 살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고라니 토끼와 일상을 지나는 향기가 아름답다.
님이 쓰는 글귀를 세인이 알아주어 그대의 이상을 크게 실현하는 그때가 기다려진다.
백오선생!
우리의 일생이 너무도 짧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미 깨달은 사람, 그런 당신곁에 잠시라도 쉬어 가고 싶다.

童蒙吉
최고의 공부를 연성하여 한차원 높은 곳에 살아가는 모습이 몹씨도 부럽다.

바람부는 바다에서 산중의 그댈 생각하면서, 바다의 노질 - 초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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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처럼
2009.01.31 12:57:16 *.220.176.189
개암나무가 깨금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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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규
2009.02.01 10:42:56 *.229.151.151
소은님_ 눈에 갇혀 며칠을 살았는데, 숲은 금새 봄이 당도할 듯 변해가고 있습니다. 준비하는 생명에게는 고난도 이처럼 지나갈 것입니다.^^

썽이리님_ 곧 빌딩 숲 속에서도 개암나무의 꽃을 만날 수 있겠군요. 모두가 계신 각처에 삶의 꽃들로 가득해 질 날을 그리워합니다.

초아선생님_ 서울은 잘 다녀가셨는지요? 준비중인 원고를 탈고하는대로 한 번 모시고 산행을 하는 계획을 품고 있습니다. 어서 그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햇빛처럼님_ 깨금나무가 개암나무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간직해왔던 식물들의 鄕名도 참 좋습니다. 도감상 표현되는 학명에만 익숙해지는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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