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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21일 18시 21분 등록



숲을 걸었습니다.

 

상쾌한 피톤치드가 나를 감싸고 짙은 초록지붕이 따가운 햇살을 막아주는 울창한 삼나무 숲길을, 온몸에 땀이 퐁퐁 솟아나도록 열심히 걸었어요. 이게 대체 얼마만의 휴식이란 말입니까. 가족을 이고 지고 가는 여행 말고 오롯이 나 만을 위한 여행은 코로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네요.

 

아시겠지만 부모님과 함께, 자녀들과 함께 등등 돌보고 이끌 대상이 있는 여행이란 결국 내 돈 들여 가는 이동형 노력봉사가 되기 십상입니다. 가족 간의 즐거운 추억을 만드는 소중한 시간이지만, 나만을 위한 휴식과는 거리가 멀죠. 추억이고 나발이고 사진 찍기도 귀찮고 그냥 모니터로 한정된 시야에서 벗어나, 삼시 세끼와 설거지의 압박에서 벗어나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휴식이 필요할 때는, 미안하지만 가족을 달고 가선 안 되는 것입니다.  

 

이번 여행은 정말 오랜만에 딸린 식구 없이 친구 셋이서 떠난 여행이었어요. ‘나 지금 콧바람 좀 안 쐬면 진짜 죽을 것 같다,’ 싶은 찰나에 날아온 친구의 카톡 메시지 한 줄에 그만 이성을 잃어서…^^; 어떤 일정을 보낼 것인지 다 들어보지도 않고 바로 숙소와 항공편을 번개같이 예약해서 친구들과 합류, 제주도로 날아갔습니다. 평소 같으면 몇 달 전부터 제일 싼 항공편, 제일 가성비 좋고 위치 좋은 숙소를 알아보느라 난리법석이었을텐데, 이런 충동 여행이었으니 그냥 돈을 한 장 한 장 길에 깔면서 다녀왔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뭐든지 피크 요금을 치러야 했습니다만. 어쩌겠습니까. 일단 불타오른 여행 욕구를 잠재울 길을 오로지 지금 당장 떠나는 것뿐이어서요.

 

그렇게 헐레벌떡 당도한 제주도는, 우리 일행이 돌아다니기에 더없이 완벽한 날씨로 반겨주었습니다. 엎치락 뒷치락 오십 고개에 들어선 친구들은 제주도에 가서도 인스타 감성 사진에 딱인 핫플을 찾아 다닌다든지, 해변을 거닐며 선탠 따위를 할 생각이란 1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내 손을 거치지 않아도 깨끗한 새 시트가 깔린 침대와 역시 남이 차려준 맛깔진 밥상으로 힐링하고, 사람들 많지 않은 조용한 숲을 찾아가 함께 걷다가 저녁이면 슬렁슬렁 숙소에 돌아와 쉬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거든요.  

 

그렇게 찾아간 첫 날의 숲은, 제주의 상징 *공장 옆에 있는, 쭉쭉 뻗은 침엽수림이 분당 최대치의 피톤치드를 뿜어내며 우릴 반겨줄 것 같은 울창한 삼나무 숲이었습니다. 숲에 들어서자 벌써 주변보다 섭씨 2도 정도는 낮아진 듯 차분하고 시원한 기운과 맑은 공기가 기대에 부푼 우리를 맞아주었습니다. 주중 내내 쌓인 피로에 지친 몸을 이끌고 아침 비행기를 놓칠까봐 새벽기상까지 한 터라, 욕심 부리지 않고 1시간 30분짜리 중급 산책로를 골랐고요. 나무와 나무 사이로 또 나무, 나무 말고는 보이는 게 없는, 그날 따라 사람도 없는 숲길을 걸으며 세 친구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여유를 만끽하는 산책이 될 테니 2시간 정도는 걸리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숲에 들어서자마자, 여유롭고 평화로운 숲길 거닐기가 경보 대회로 돌변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의 멈추지 않는 미친 발ㅜㅠ 때문이었는데요. 제 별명인 종종은 사실, 종종걸음의 줄임말이예요. 의식하고 제동을 걸지 않으면, 같이 걷는 분이라면 열 중 여덟은 헉헉 대며 잠깐만을 외치게 될 정도로 빠른 걸음을 자랑합니다. 평소에 길을 걷는다는 것을 워낙 일과 집 사이를 최단시간에 이동하는 수단으로만 여기고 있어서 그런지, 오로지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최단시간에 이동하겠다는 목표의식과 속도가 몸에 배어서 저절로 걸음이 빨라지고 맙니다. 그게 바쁜 출퇴근길이 아니라 여유로운 숲길 산책이어도, 몸에 벤 습관 때문에 속도 조절이 도무지 안 되는 겁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한참을 헉헉대며 걷다 보니 친구들은 따라오기를 포기한 채 이미 모습도 보이지 않는 뒤편으로 처졌고, 저 혼자 숲 속 레이스를 펼치고 있었더라고요. 하는 수 없이 친구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나 혼자 차지한 숲을 그때서야 천천히 둘러 보았습니다. 평평하게 잘 고른 흙길 양 옆으로 삼나무 숲이 울창했던 초입과 달리, 어느새 주변은 키 작은 관목들이 들어찬, 구비구비 검고 울퉁불퉁한 화산암 지대로 바뀌어 있었어요. 그리고 숲의 향기마저 달라져 있었습니다. 초입 삼나무 숲을 지날 때 느꼈던 시원 쌉싸름한 나무향이 사라지고, 키 작은 관목 숲에선 바람 끝에 살짝 달콤함이 묻어나는 게 풋풋한 소녀에게 어울리는 향수 같았습니다. 이렇게 아예 다른 숲에 들어온 듯 완전히 다른 풍광으로 변했는데도, 저는 눈치도 못 채고 발 밑과 앞만 확인하며 속도를 올리고 있었던 거죠.

 

그때서야 일이며 살림이며 죄다 떼어놓고 쉬러 온 이 곳에서도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숲 속을 경보로 통과하고 있는 제가 너무 어이없어져서, 친구들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을 정도로 간격을 유지하면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습니다. 속도에 집중하던 때 보지 못하던 풍경과 제 몸이 감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느끼면서, 누리면서 남은 숲길을 즐기려고 중간 중간 부러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요.

 

일하는 것만큼 잘 쉬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지만, 쉼도 일만큼이나 학습이 필요한 것인지, 몸에 배지 않은 쉼의 시간은 또 일과 비슷한 모양새로 흘러가 버리곤 합니다. 뒤처진 친구들의 존재만 아니었다면 저는 또 숲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 채 예상 시간 30분 단축! , 이런 의미 없는 기록을 자랑하고 있었겠지요?

 

남은 일정은 교대로 차를 운전하는 두 친구를 위해 듣기 좋은 음악을 골라 틀고, 조금 더 천천히 걷고, 조금 더 천천히 먹고, 더 많은 곳에 가보는 게 아니라 더 편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시간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출근한 월요일은 예상보다 꽤 괜찮은 하루가 되었답니다. 모처럼 일상을 떠나 스스로 허용한 여유가 스리슬쩍, 사무실로도 따라온 건 아닌지 싶네요.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좋았던 세 친구의 여행을 한 마디로 표현한 한 멋진 노래 한 곡을 띄우면서 저는 편지를 마치겠습니다.

 

박재범의 좋아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MtCJC39S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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