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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2일 12시 37분 등록

2022712

화요편지 종종의 종종덕질

생존을 넘어 진화하는, 냉면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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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냉면과 꽤 막역한 사이입니다.


언제부터 먹었는지는 알 수 없고, 언제나 먹었다는 것만 압니다. 저의 본가는 평안북도 출신으로, 거짓말 좀 보태 혈관 속에 냉면 육수가 흐르는 모태면식인이라 자부하지요. 할머니에서 아버지, , 그리고 이제 제 아들에 이르기까지 외식하면 일단 생각하는 건 냉면, 거대한 스탠 그릇에 툭툭 꾾어지는 메밀면이 중심이 되고 무절임, 계란 반 개와 편육 두 조각이 얹힌 사리 위로 맹물 같은 맑은 육수를 부어내는 평양식 냉면만 접수합니다


잘 알려져 있듯 이북사람들의 냉면 사랑은 워낙이 그 유래가 깊은지라, 평북 정주 출신의 시인 백석도 뜨거운 아랫목에 앉아 얼음이 동동 뜬 동치미국물에 국수를 말아먹는 겨울밤 정경을 노래한, ‘국수라는 명시를 남긴 바 있지요. 저희 가족 또한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도 왠지 출출한 겨울밤이면, 할머니가 훌훌 말아 내시던 시원한 동치미국수를 잊지 못합니다.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입덧 심했던 어머니가 저를 갖고 유일하게 즐겨 먹던 음식도 냉면이라니, 이만하면 모태면식인이라 부를만도 하지 않나요.


저희 식구들은 형제건 부모 자식이건 생긴 것도 너무 다르고, 취향이며 스타일 또한 심하게 제각각이라 온 가족을 한 자리에 모아놔도 외양부터 하는 짓까지 역대합실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인가 싶게 닮은 점이 없습니다. 게다가 인생은 각자, 알아서 잘 살자가 모토인 쿨한 성향들이어서, 아무도 못 속인다는 핏줄의 힘을 딱히 느끼지 못하고 지냅니다. 그런데 누가 가르친 게 아닌 데도 동일하게 발현되는 딱 한가지가 바로 입맛, 특히 냉면부심이거든요. 그러고 보니 우리 가족의 유전자는 사시사철 냉면에 반응하는 고집스러운 입맛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입맛이란 이토록 고집스럽고, 특히나 어려서부터 먹던 음식에 대해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잖아요. 저 같은 본투비냉면덕후들은 수십 년째 다니던 노포에 길들여져 있으니 그 단호한 입맛을 꺾기가 만만치 않고요. 그리고 음식 좀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냉면은 그 단출한 모양새와 달리, 제대로 맛을 구현하기가 대단히 까다로운, 요리사들 사이에서도 난이도 최상의 음식으로 손꼽히는 음식입니다.


한 번은 할머니와 어머니가 합심해서 이북서 특별한 날에 해드셨다는 꿩냉면을 무려 반 세기 만에 재현해보겠다며 어렵게 구한 꿩고기로 육수를 내서 냉면을 만들어 본 적이 있었는데, 다들 한 그릇을 비우고 나서 이구동성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제부터는 그냥 사먹자고요. 밍밍한 듯 슴슴한 듯 은은한 감칠맛의 육수와 메밀면의 밸런스를 맞추기가 생각보다 너무 너무 어렵거든요.


그러니 언제나 가던 곳만 가게 되고, 수십 년째 같은 호마이카 탁자를 쓰는 오래된 가게에 가면 손님들조차 대부분 고향의 맛을 잊지 못하는 노인분들이 대부분에 계산대에 앉아 계신 사장님도 백발이 성성합니다. 그런 노포에서 냉면이 나오길 기다리다 보면, ‘내가 이 음식을 대체 언제까지 먹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곤 했어요. 만들기는 어렵고, 고객은 죄다 노인들이라면 저절로 명맥이 끊기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 정든 노포와 냉면이라는 음식도 결국 6.25세대와 함께 퇴장하려나 싶어, 조금은 서글픈 마음으로 식당 구석 구석을 눈에 새기곤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어떻게든 냉면동지를 좀 늘려볼 요량으로 지인들을 냉면 장인들의 식당에 데려가도 다들 이걸 무슨 맛으로 먹냐며 반응이 영 시원찮더니 말입니다. 몇 년 전부터 미식평론과 먹방을 혼합한 프로그램들에서 미식 입문의 기초 같은 음식으로 냉면을 소개하면서 냉면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입니다.  늘 다니던 노포가 레트로열풍을 타고 젊은 친구들의 인스타 성지로 떠올라 줄을 서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핫플이 되고, 여름 한 철 장사에다 까다로운 음식이라 외식업계에서도 기피 대상이었던 평양냉면 전문점을 표방하는 가게들이 속속 문을 열기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유명한 쉐프들이 이름을 걸고 오픈했다는 냉면전문점에 가도 실망을 금할 수 없었는데 말이죠. 역시 인재가 몰리면 그 업계는 기회를 맞는 법인지라, 몇 년간 시행착오와 부침을 겪어낸 끝에 이제는 제법 기존의 노포에 도전할만한 새로운 냉면 명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아들과 동네 산책 중에 특이한 이름과 외양의 가게를 발견했어요. 예쁘장한 앤틱 느낌의 간판과 벽지, 짙은 갈색의 테이블과 샹들리에를 보니 브런치 식당 느낌인데 가게 이름은옥돌현옥’.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메뉴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평양냉면과 어복쟁반, 가자미식해와 만두, 이 구성이면 빼박 이북음식전문점인데 여기에 와인 페어링을 권하는 식당이라니요. 그래서 열대야가 시작된 주말에 아들과 함께 이 새로운 식당에 원정을 가기로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간인 금요일 저녁에 아들과 평양냉면과 만두 한 접시. 모든 것이 완벽했습니다. 오래된 냉면 명소의 냉면 한 그릇 가격이 2만원에 육박하게 된 요즘, 보기 드물게 가격마저 착하더군요.


덕분에 불쾌지수가 천정을 찌를 듯 습하고 더운 저녁, 시원한 냉면 한 그릇에 하루 종일 따라다니던 더위가 가시고, 핸드폰만 보고 있던 아들과 면발처럼 술술 대화가 풀리는 마법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거기다 서빙을 해 주시던 분도 얼마나 센스 넘치고 친절하시던지요. 아직 오지 않은 아들을 기다리는 저에게 면발이 불지 않도록 신경 써서 서빙 타임을 늦춰 주시고, 몇 알 남은 만두를 집에 가서 국에 넣어 먹으라며 싸 주시는 마음새가 이웃집 언니처럼 정다웠습니다.


맛집이 즐비한 먹자골목도 아니고 주택가인 우리 동네까지 이렇게 내공있는 냉면집이 자리잡은 것을 보니, 저희 가족들의 정체성과도 같았던 이 음식이 세대를 넘어 살아남고 진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오래 살고 볼 일, 기다리고 응원하면서 지켜볼 일이지요.  냉면의 생존도, 자식의 성장도, 어떤 거대한 조직의 흥망성쇠도 시간의 흐름 속에 어떤 변수가 등장할 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냉면 한 그릇을 놓고 별 생각을 다 하는, 실은 국수를 놓고 가장 많은 생각을 하는 면식수행자 종종의 화요편지는 여기까지입니다. 오늘 점심은 시원한 냉면 한 그릇 어떠세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주제가는 올림픽대로 가요제가 배출한 어이없는 듀오, 제시카와 박명수가 함께 부른 냉면공유합니다. 시원한 하루 되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0zGDQ9r36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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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 appet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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