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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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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30일 18시 30분 등록

저와 전혀 관계없는 사회 구성원들과 직접 부딪히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바로 통근 지하철 안입니다. 임산부가 되면서 저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과 매우 혼잡한 공간에 일시적으로 함께 있으면서 무언의 상호작용이 일어나곤 합니다. 임산부로 지하철이 가장 혼잡한 시간에 지하철을 타면서, 임산부석을 둘러싼 사람들의 생각을 알게 됩니다. 임산부석을 비워놓는 일은 강제사항이 아니니 개인의 가치관이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 제가 지하철을 타는 구간이 길지는 않습니다. 9호선 급행 세 정거장을 타고 완행으로 갈아타서 한 정거장을 오거나 완행만 9개 역을 타면 되니까 시간적으로는 아무리 오래 걸려도 25분 정도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지하철을 떠날 수 있습니다. 체류 시간이 짧아 함께 타게 되는 승객들의 반응을 보며 사회 문화를 관찰하는 시간처럼 느껴집니다.


일반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임산부석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물어보면, 대부분 ‘같은 칸에 임산부가 타고 있지 않아도 임산부석에는 앉지 않는다’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실제로 임산부석은 대부분의 경우 경우 비어있습니다. 임산부석에 가방을 올려놓거나, 임산부석 옆 칸에 앉아서 조금 여유롭게 임산부석을 침범해 앉는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봐서는 ‘비어있는 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타는 시간대가 퇴근 시간이라는 점에서, 지친 사람들이 더러 앉아있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임산부 입장에서도, 물론 제가 임신을 해서 몸이 무겁고 힘든 것은 맞지만 누군가에게는 고단한 하루 끝에 결국 임산부석에 앉아서 가는 작은 휴식시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누가 앉아있으면 제가 먼저 비켜달라고 말하는 게 꽤 조심스럽습니다.


그리고 제가 탔을 때 다른 임산부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이 임산부석에 앉아 있는 경우, 나이가 지긋하신 아주머니들이 앉아 계시거나, 큰 짐을 가진 승객이 앉아있을 때가 꽤 많았습니다. 그러면 비켜달라고 말을 해도 성가신 소리를 하며 마지못해 비켜주는 과정을 거치거나, 사람으로 꽉 차서 움직이기도 어려운 지하철 안에서 자리도 바꾸고 짐도 이동시켜야 하는 물리적 과정이 너무 아득하게 느껴져서 그냥 입을 다물고 맙니다. 무엇보다 이런 분들은 임산부 배지가 눈앞에 보여도 고정한 듯이 핸드폰만 보는데, 아마 모른 척하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몇 번을 제외하고는 많은 분들이 혼잡한 와중에 제가 임산부석에 앉을 수 있도록 길을 터주거나, 누가 앉아있으면 대신 이야기를 해주거나, 심지어는 다른 임산부가 이미 임산부석에 앉아 있어서 제가 일반 자리 앞에 서있을 때에도 자리를 양보해 주었습니다. 오늘 글은 이런 분들의 선택이 제게 남긴 감상을 정리하고 싶어서 시작했습니다. 통근 시간은 지하철 승객들의 반응을 관찰하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제 마음 속 반응을 관찰할 수도 있는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아주 작은 것이라도, 누군가의 호의나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직접 느낀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저부터도 특별히 타인을 위해 양보하거나 호의를 보이는 것이 필수가 아니며, 때로는 다른 사람의 무임승차에 제 호의가 악용된다고 여겨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혼잡한 통근 지하철이라는, 일상적이지만 상당히 복잡한 공간에서 어렵게 잡았던 좌석을 양보하거나, 몸을 틀기도 어려운 좁은 공간에서도 어떻게든 길을 터주고, 자기 생각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작은 깨달음을 얻게 만들어주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하철의 임산부 좌석은 권고 사항입니다. 사회 구성원들이 지키지 않는다면 이 좌석은 일반 좌석과 다를 게 없는 자리였을 것입니다. 녹록지 않은 출퇴근 길에서 아직 사람들의 마음속에 배려와 존중의 마음이 남아있다는 것이 참 고맙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이런 경험을 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무엇보다 앞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이런 부분은 꼭 알려줘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마음 편지의 독자분들도 비슷한 상황에서 마음의 갈등이 생기신다면 그때 오늘 제 편지를 기억해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겉으로 감사한 마음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아마 여러분의 배려와 양보를 받은 대상은 그 순간은 참 따뜻하게 기억할 것입니다. 작은 실천으로도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은 꽤 괜찮은 경험인 것 같습니다.

IP *.143.23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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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30 19:04:06 *.225.171.202

퇴직후엔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다보니 자연스레 지하철을 자주 타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갈 때마다 적당히(?출퇴근 시간은 피하는 편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채워진 우리 칸에서 비워진 임산부석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래도 따뜻하고 상식적인 사람들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낯선 사람들이지만 상식과 윤리를 공유할 수 있다는 생각에 웬지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순산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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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1 10:21:48 *.97.54.111

요즘은 승용차로 출퇴근을 하기에 지하철을 타지 않아 상황을 잘 모릅니다.
그래도 다들 힘들텐데,  비어있는 좌석이 있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모든 면에서 이렇게 서로 서로 배려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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