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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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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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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3일 00시 05분 등록
대학1학년 때, 아들의 목표는 열 다섯 가지였습니다. 그 중의 첫 번째는 ‘여자친구 사귀기’였지요. 2학년이 되어 그 목표는 여덟 가지로 압축되었지만, 여전히 첫 번째는 ‘여자친구 사귀기’였습니다. 그리고 녀석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진동아리의 멤버 한 명이 흑장미가 되어주었거든요.


아들과 여자친구는 신세대답게 알콩달콩 잘 지냈습니다. 매일 점심을 같이 먹고, 얼짱 각도로 찍은 사진을 판넬로 만들어 선물하기도 하면서. 그 애들의 놀이 중에 이런 것도 있었습니다. 여자친구가 가수 이승환 마니아인 것을 배려한 놀이인데요, 아들이 여자친구에게서 이승환 CD를 한 장씩 빌려서 듣고, 그것에 대한 소감이나 관련 글을 써서 ‘이승환레터’를 만들어 되돌려 준다는 겁니다. 그것도 손으로 써서. 그 얘기를 듣고 감탄한 내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이 좋은거다. 니가 언제 또 그 짓을 하겠니.


아들이 군대에 간 지 67일이 되었습니다. 혼자 남은 여자친구가 종종 메일을 보내옵니다. 우울하다고, 중간고사 끝나고 읽을 책 좀 추천해달라고, 기분이 훠얼 나아졌다고, 재잘재잘대는 내용입니다. 그러더니 엊그제 이 적의 노래 ‘다행이다’를 보내왔습니다. 아름다운 노랫말입니다.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마주보며 숨을 쉴 수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힘이 들면 눈물 흘릴 수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


젊은 날의 나는 왜 그렇게 무미건조했을까, 생각하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연애-결혼-중산층의 삶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거부하느라, 말랑말랑한 연애감정 자체를 거부했었지요. 어머니의 삶으로 대변되는 여자의 삶에는 아무런 메리트가 없었습니다. 자연히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날 일이 없었지요.


그러고도 오랫동안, 낭만적 사랑을 살짝 얕보는 태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이 예기치않은 매혹적인 상태에 메스를 갖다대는 식이었지요. 사랑은 뇌에 특수한 물질이 분비되는 화학반응이라서, 길어야 3년에 불과하대, 그걸 평생에 걸쳐 늘여놓은 것이 결혼제도이지. 사랑에 목매는 사람들을 의존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는 독립의식이 사랑과 배치된다고 생각했던걸까요.


“나 없는 곳에서 아프지 말아요.”
주인없는 아들의 미니홈피에 여자친구가 남긴 말을 보며, 나는 내 자세가 틀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은 그 순간 만으로 충분한 것이구나. 상처입을 것이 두려워 미리 방어벽을 칠 필요가 없는거였구나. 어린 연인들의 사랑에 관심을 갖기보다, 군 복무 중에 아들이 처하게 될지도 모를 상황에 급급했던 내가 민망했습니다.


나와는 달리 아들이 “거친 바람 속에도 젖은 지붕밑에도 홀로 내팽개쳐져있지 않다는게, 지친 하루 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게,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던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때문이라는것”을 일찍 깨닫게 되어 다행입니다.


오래도록 내게는 ‘他者’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경미한 자폐증에 가까운 상태로 내 안에 갇혀 살았는데, 변화경영연구소와의 만남은 나를 깨고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내가 원해온 삶의 방식이 여기에 있습니다. 애인보다 끔찍한 스승과 知己에 대한 꿈이 황홀합니다. 인격의 중심이 만나는 일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내가 진실로 존재한다면, 나의 삶 전체가 하나의 교류가 될터인데. 죽음이 앗아가기 전에 이 몸을 사람에게 주어라. 내가 소통입니다. 늦게나마 내가 사람에게 마음을 열게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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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2007.05.03 23:16:15 *.230.174.166
내 아들이 군에 갈때쯤, 아름다운 여친과 멋있는 아들을 생각하며 저도 짠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요즘, 아빠보다 엄마를 더 찾는 녀석들을 볼때면 괜히 질투가 느껴지는데... 한명석님 글 보니 여친까지 엄마와 가까와지는군요. 아빠는 외로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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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7.05.04 07:21:08 *.155.113.232
제 글을 그런 각도로 읽는 방법도 있었군요. ^^
바람처럼님, 저는 아예 아들딸에게 훈계할 생각을 버렸답니다. 자기 세계를 키우지 못하고 자식만 바라보면서, 돌봄과 훈계의 언어밖에 갖지못한 친정어머니의 모습에서 배운 것이지요.

나 스스로 즐기고 자족하는 세계의 구축에 노력하되, 가족과는 최대한 함께 노는 사이가 되어야 할 것같아요.

엊그제도, 수업 땡땡이 치고 쇼핑가자는 말에 오케이 했더니, 딸이 엄마맞냐고 하더라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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