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오늘의

마음을

마음을

  • 아난다
  • 조회 수 1003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20년 8월 3일 20시 31분 등록

미로공원.JPG


엄마가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내가  딸아이만했을 무렵, 그러니까 초등학교 5학년 즈음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 대신 들큰한 냄새가 나를 맞았다. 십팔 평 군인아파트의 복도같은 거실을 통과해 안방문을 열면 쓰러져 자고 있는 엄마 곁에 이불산이 우뚝 서있었다. 수건도 아니라 아예 이불로 덮어두었던 건 어떻게든 나에게 토사물을 들키고 싶지 않은 취한 엄마의 단도리였을지도 모르겠다. 몰랐으면 하는 거라면 모른 척 해주는 게 예의지.

 

문을 쾅 닫고 방을 나와 주방에 걸려있는 달력에다 엑스표시를 했다. 이번 달만 벌써 며칠 째야. 가스렌지에 불을 켜고 돼지기름이 굳어있는 김치찌개를 데운다. 국그릇에 밥을 푸고 그 위에 김치찌개를 얹여 식탁에 놓는다. 숟가락으로 꾹꾹 눌어 찬밥덩어리를 김치찌개에 풀어내고 식탁위에 놓여있던 꽈리고추를 하나 집어 밥에 올린다. 한입 베어 문다. 방안에서 맡은 토사물 냄새와 비슷한 맛이다. 그래도 꾸역꾸역 한 그릇을 다 비운다.

 

왜 우리엄마는 우리 엄마여가지고. 나보다도 더 글씨를 못 쓰는 엄마. 주민등록초본 두 장을 꽉 채울 정도로 이사를 다니면서도 전입신고 한번 손수 하지 못하는 여자. 못 배워 처먹은 여자. 십 원 한 장도 못 벌어오는 여자. 그게 우리 엄마다. 십팔 평 좁은 아파트에 친정, 시가 군식구들 다 치러내고도 고맙다는 공치사 한번 못 듣는 여자. 나랑은 다른 세계에 속한 여자.

 

그런 엄마가 아빠 욕을 하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아빠가 부족한 엄마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하는데, 아빠가 무너지면 우리는 다 같이 망하는 건데. 도저히 엄마 편을 들 수가 없다. 니미***같은 년. 그 정도 욕으로 참아주는 것도 황송해 해야지. 얼마나 속이 터지면 때렸겠어. 몸에 멍 좀 들면 그게 뭐 대순가. 어차피 방구석에서 술 처먹느라 밖에도 못 나갈 텐데.

 

술을 안 마신 엄마는 참 포근했다. 쪼가리, 쪼가리 박쪼가리. 내 작은 발바닥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흥에 겨워 읖조리던 엄마의 목소리는 몸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발바닥이 엄마 손 위에 올라갈 무렵이니 기억이 날 리가 없는데도 엄마의 다정한 눈빛, 엄마가 입은 하늘색 폴라, 단정한 단발 파마머리가 이뻐 어쩔 줄 모르겠다는 목소리와 함께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재생된다.

 

엄마가 깨어날 때까지 건넌방에 쪼그리고 앉아 갈색 표지의 계몽사 세계문학전집을 꺼내 읽는다. 뭘 읽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숨죽이고 진짜 우리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드디어 목욕탕에서 빨래방망이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가 이불을 빠는 모양이다. 이제 창문도 열어놓았으니 다른 식구들이 돌아올 즈음엔 냄새도 다 빠질 것이다. 오늘 저녁은 오징어 볶음인가보다. 엄마의 오징어 볶음은 맛이 기가 막힌다. 갓 지은 밥에 올려 쓱쓱 비벼먹으면 밥 두 공기는 순식간이다. 입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한다. 잿빛이던 세상에 조금씩 색이 돌아온다.

 

이렇게 좋은 엄마 안에 술취한 괴물 엄마가 들어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들켜선 안 된다. 엄마가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무식한 여자라는 것도, 자꾸 아빠를 화나게 해서 몸에 멍이 가실 날이 없다는 것도, 엄마가 맞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는 것은 내가 엄마를 감시하는 간수 역할을 너무 잘해서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여자로서, 인간으로서 엄마의 삶과 마주할 기회를 처음 가졌던 것은 10년 전이었다


이전글 : 욕심, 실은 깊은 두려움

블로그 : 내 삶에 변화가 찾아올 때

이미지 : 미로에서 만난 풍경 in 제주 김녕미로공원




--- 변경연에서 알립니다 ---


1. [출간소식] 『박노진의 식당공부』 박노진 저
음식보다 마음을 파는 외식 경영 전문가 박노진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지 않는 외식업 데이터 경영 노하우의 모든 것을 공개한다. 위기시대의 식당 사장님들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 싶은 마음으로 썼다성공하는 식당들을 만들었던 박노진의 데이터 경영 강의 자료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엮었다.

http://www.bhgoo.com/2011/862280#2


2. [출간소식] 『언어의 유혹』 도명수
유혹하는 언어는 누구에게나 있고산다는 것은 자기만의 언어를 갖는 것자기만의 언어를 갖기 위해서는 자신을 유혹하는 언어를 찾아야 한다마음을 설레게 하고 가슴을 떨리게 하며 영혼을 끌리게 하는 언어가 바로 유혹하는 언어다이처럼 ‘유혹하는 언어’라는 개념을 상정하고저자 자신이 직접 사전을 뒤져가며 찾아낸 말들을 엮어 내놓았다

http://www.bhgoo.com/2011/862209#3


3. [출간소식] 『오티움』 문요한 저
 '
오티움ótĭum'은 라틴어로 '내 영혼을 기쁘게 하는 능동적 휴식'을 말합니다저자는 몇년 간 운동, , 공예, 사진, 글쓰기, 그림, 가드닝, 악기연주, 명상, 봉사 등 능동적 여가활동을 즐기는 약 40 여명의 사람들을 심층인터뷰했습니다. '자력自力의 기쁨' , 오티움으로 사는 건강한 이들은 자기세계로 초대합니다

http://www.bhgoo.com/2011/861866


4. [출간소식] "인생에 답이 필요할 때 최고의 명언을 만나다" 김달국 저
'
에머슨, 쇼펜하우어, 니체, 틱낫한, 안셀름 그륀, 발타자르 그라시안, 오쇼 라즈니쉬, 크리슈나무르티, 칼릴 지브란, 톨스토이' 삶의 길을 찾기 위해 철학자, 사상가, 종교인 등 10인의 스승을 만나다작가의 해석과 삶의 지혜를 덧붙인 167개의 보물을 담고 있다. 너무 짧지 않은 글에 진지한 생각거리와 깊은 지혜가 담겨 있어 곁에 두고 읽기 좋은 책입니다

http://www.bhgoo.com/2011/861692#2



IP *.138.79.9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