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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마음을

2020년 12월 6일 23시 21분 등록

엄마. 나야. 큰아들.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내가 전화도 자주 하고 카톡도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 많이 나누었는데 요즘은 소홀해졌어. 전화를 하든 카톡을 남기든 그래도 사랑한다고 말은 가끔이지만 했었잖아. 쑥스럽긴 해도 말이야.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미안하단 말은 한 번도 못했던 거 같아. 사랑한다는 말보다 미안하단 말이 입 밖으로 안 나오는 이유가 뭘까? 사랑한다는 말은 지금의 감정이지만 미안하단 말은 오래된 과거들의 감정이라 그런가 봐. 오래된 감정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기엔 역부족이잖아. 그래서 미안한 감정이 생길 때마다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바로 감정의 실타래를 풀어야 앙금이 남지 않는 것 같아. 난 그 골든 타임을 여러 번 놓친 거지.


대학 졸업식을 몇 개월 남겨 놓고, 대기업에 취업했을 때 엄마가 내 손을 쓰다듬으며장하다. 잘했다 큰 아들하며 행복해하던 모습이 눈에 선해. 행복해도 눈물이 나오는 줄 처음 알았던 거 같아.


하지만 막상 직장 생활을 해보니 완전 전쟁터였어. 이놈의 회사가 새벽 3~4시까지 회식하며 술 마시게 한 뒤 8시에 정시 출근 하나 못하나 테스트를 해 대는 거야. 그것도 일주일에 2~3번이나. 젊었으니까 그리고 난 가난이 주는 고독과 슬픔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었으니까 정신력과 책임감으로 버텼었지


그런데 최대 고비가 머지 않아 찾아왔지. 난 고객이 주문한 물건의 납기를 맞추기 위해 회사 공장 사람들에게 아부하고 싸우고 빌면서 생산 요청을 해야 했었어. 그렇게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는 언쟁과 밀당을 주고 받았지만 신입 사원인 나에게 조직은 직급이 깡패인 것처럼 각인 되었어. 그리고 왼쪽에서 또는 오른쪽에서 호시탐탐 내 뒤통수를 노리는 못난 선배들에게 뒤통수를 맞았고 그 벌로 고객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납기를 못 맞춘 죄를 빌어야 했어. 그리고 난 큰 결심을 하게 되었어. 9번째 월급을 받고 10번째 월급을 포기해버렸어.


#사표를 내던 날


슬퍼할 엄마의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랐어. 그래서 숨었어. 틀어박혀 이력서를 쓰고 지원하는 일에만 몰두했어. 엄마의 연락을 무시했어. 일일이 설명하기도 귀찮았고 작은 일에도 심장이 약해 크게 놀라는 재주가 있는 엄마를 걱정하는 척했던 거야. 죽은 듯이 세월은 흘렀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옛말은 엄마에겐 거짓부렁이었나 봐.


전날 마신 알코올 냄새가 내 좁은 자취방에 퍼지고 속이 쓰려 간신히 일어난 오후 2시쯤. 핸드폰의 음성 메시지를 듣고 짜증이 밀려왔어. 인천에서 지하철을 타고 서울까지 와서는큰 아들 엄마다. 자취방 앞이니 잠깐이라도 나와 보렴~’  


. 왜 이러시는 거야. 짜증 나게 정말. 가만 놔두면 알아서 잘할 텐데. 음성 메시지 도착 시간을 보고 더 짜증이 났어. 2 시간도 훨씬 전이야. 얼굴에 세상의 모든 짜증을 구겨 넣고 걸어 나갔어. 내가 졸업한 대학교 정문 앞에 앉아 있다 내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환희 웃는 엄마의 얼굴. 그리고 손에 들려 있던 딸기 한 박스. 불쾌하다는 듯 엄마를 쏘아붙이고는 다시 돌아 서려는 순간



# 그 망할 놈의 딸기



엄마는 내 손을 잡고 그 망할 놈의 딸기를 기어코 내게 떠미는 거야. 엄마에겐 충분히 쏘아댔어. 이제 딸기에게 내 감정을 표출할 때가 온 거였지. 타이밍상 그랬어. 빨갛게 익은 딸기가 시멘트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어. 경사면을 타고 흘러내리던 딸기도 있었고 할복해 죽은 딸기도 있었어. 흘러가던 딸기 하나를 주워 담으려 애쓰는 엄마가 창피해 난 서둘러 그 장소를 벗어났어.


엄마가 그 딸기를 다 주워서 누구와 먹었는지 쓰레기통에 버렸는지는 몰라. 근검절약이 몸에 밴 엄마니까 엄마가 먹었을까? 그러진 못했을 거야. 내가 버린 딸기를 가슴 아파서 어찌 목구멍으로 넘겼겠어. 통곡했었을 거야. 안 봐도 다 알아. 다 아는데 미안하다고 아직까지 말 못 했네. 이 말하는데 십 년도 넘게 걸렸어. 미안해 엄마. 정말로 미안했어 그때.


조금만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니 미안했던 장면 하나가 또 떠오르네. 입영통지서를 받고 군대 입대하던 날. 난 대학교 2학년이었고 캠퍼스 커플로 한참 사랑에 눈을 뜨며 행복해하던 시기였지.


그녀는 우리 집이 가난한 줄 몰랐지. 그녀에겐 내 부모님 학력과 가진 돈에 대하여 보고할 의무가 없었으니까. 큰 아들이 군대 간다는 건 엄마에게도 처음 접하는 큰 사건이었지. 군대 구타도 심했었고 연락도 허락되지 않는 시기였으니까. 나도 군대가 두려웠어. 무엇보다 사랑하는 애인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슬펐지.




입대하는 날이 밝아 왔어


혼자 떠날 준비를 마치고 문을 나서는데 엄마도 따라나서는 거야. 몇 번을 설명했잖아. 난 대학 친구들과 중간에 만나서 의정부 훈련소까지 이동할 테니까 걱정 말고 계시라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까지만 같이 가고 싶다고 했지. 그 말을 믿고 마을버스를 타고 인천의 한 지하철 역까지 같이 갔어. 마을버스 안에서 간혹 마주치는 엄마의 얼굴은 벌써 눈물이 고여 있었어. 내겐 엄마를 위로해 줄 시간적 여유가 없었어. 마음의 여유라고 하는 편이 솔직하겠네. 헤어질 여자 친구와 멋지게 헤어져야만 했으니까.


지하철 표를 끊고 개찰구를 통과하려는 순간 엄마도 후다닥 개찰구를 통과했지. 지하철 역까지만 같이 간다고 말해 놓고는 지하철 안까지 들어오는 엄마의 거짓말에 짜증이 났어. 이러다 입대하는 군 장병들이 집결하는 의정부까지 엄마도 따라가겠다고 우기면 여자 친구와 마지막 사랑의 밀담을 나눌 나의 계획이 틀어질 테니 그것이 짜증이 났었던 거야. 하지만 나도 군대가 처음이라 두려웠고 여자 친구와의 이별 앞에 내 감정이 평온함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어.


소리를 질렀던 거 같아. 엄마도 자식을 군대에 보내는 것이 처음이었는데 엄마의 입장에서는 왜 생각을 못했는지 참 어리석었어. 그리고 지하철이 역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올 때, 다음 지하철을 타겠다고 엄마에게 거짓말을 했지. 지하철 문이 닫히려는 순간을 이용해 잽싸게 나만 탑승했고 문은 그대로 닫혀 버렸어.


지하철 문에 뚫린 유리로 당황하는 엄마 얼굴이 보였어. 엄마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사정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어. 서서히 움직이는 지하철 문을 연속해서 두드리며 내 눈을 쳐다보려 했고 그럴수록 난 모자를 더 깊숙이 눌러 앞을 보지 않으려 했어. 역을 출발한 지하철이 다음 역 그리고 또 그 다음 역에서 사람을 내리고 태우며 문이 열렸어. 주책없이 내 눈물샘도 덩달아 열렸어. 내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인생이 야속했어. 그리고 미안했어.


흔하디 흔한 군바리 사랑 이야기처럼, 나도 군대 가자 마자 1달 만에 여자 친구와 헤어졌어. 아니 위문편지를 가장한 일방적인 통보였지. 그럴 줄 알았다면 당연히 입영하는 날 여자 친구 대신 엄마를 선택했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

나랑 허망하게 헤어진 그 망할 지하철 역에서 무슨 정신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지. 군대 입소하는 날 입었던 내 옷이 내가 훈련하던 군대의 주소가 적힌 소포로 집에 도착한 날. 엄마가 그렇게 그 옷을 붙잡고 하염없이 울었다는 남동생의 말을 듣고도 미안하단 말을 못 했어. 미안해 엄마.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내 전체 삶 속에서 딱 한 장면만 재편집할 천운이 내게 허락된다면, 입대하던 그날, 서서히 움직이던 지하철 문을 안타깝게 두드리던 엄마에게 고개를 들어 말해주고 싶어


사랑해 엄마. 군대 건강하게 잘 다녀올게~”



IP *.37.9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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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7 10:03:18 *.47.89.107

이거 아침부터 눈물이 나네요 ㅜㅜ

저두 어머니께 전화 드려서

미안하다 말씀드려야 겠습니다.


그런데, 딸기한테 정말 너무했고, 지하철 급하게 타기는 엄마가 정말 많이 놀라셨을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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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3 23:27:00 *.37.90.49

Jack님, 소중한 댓글 고맙습니다. 맞아요 딸기한테도 너무했고 어머니를 놀래키는 것도 너무 했었죠~철이 없었던 제가 지금은 그래도 내적 성장을 조금씩이나마 이루고 있어서 이렇게 미안하단 말까지 하게 되는 용기를 얻었네요~Jack 님 어머님께 전화 잘 드렸나 궁금하네요~좋은 날들이 계속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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