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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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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3일 19시 56분 등록


난 마치 웃는 듯 거칠게 호흡하고 있다.


 

입사 후 3, 나는 첫 진급심사에서 누락됐다. 수치스러웠다. 업무는 지지부진했고 반복되는 일과는 지루했다. 최선을 다하지도 그렇다고 형편없지도 않았다. 삶은 나를 떨리게 하지 않았다. 조직의 사다리 맨 끝을 로망처럼 우러러 봤지만 첫 관문부터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구석에 내팽개쳐진 내 목발처럼 어두운 시간들이 거듭 밀려왔다. 세상과 맞짱 뜨리라던 호기 넘쳤던 신입사원은 온데간데없고 거북목을 한 월급쟁이가 되어 갔고 매력 없는 사람이 되어 갔다.



만년설을 동경했으나 발목은 산산이 바수어 졌고 직장에서만큼은 만회해 보려 했던 실낱 같은 희망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나는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때, 나는 죽은 사람 같았다. 부러진 다리로 인해 절망이 내 안의 모든 희망을 진압하고 있던 때,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되는 그 때, 내 이야기는 시작된다. 절망은 사람을 죽이기도 또 살리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을 다루는 연습이 필요할지 모른다. 희망은 절망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에겐 꿈이 있었노라 외치는 1그램의 회심이 내 안에 살아있음을 알았다. 나는 3일간 단식을 하며 그 1그램의 부피를 찾으려 필사적으로 내면을 헤맸다. 어제의 나와는 이제 영원히 단절하고 말리라는 의식(ritual)처럼 곡기를 끊었다. 절실함만 남겨두고 일상의 모든 습관으로부터 나를 단절 시켰다. 그리고는 오로지 나에 대해서만 고민하기 시작한다. 나의 맨 아래, 그 내면의 고요함이 흘러 넘치는 지점에서 앞으로 10년을 그렸다. 지금으로부터 10년 후 지점으로 나를 미리 데려다 놓고 지난 10년간을 마치 나에게 벌어진 일처럼 기쁜 마음으로 회상했다. 나에게 일어날 그러나 이미 일어난 숨 막히는 광경 10가지를 뽑아 들고 생생한 기록으로 남겼다.



미래가 손에 쥐어졌다. 나는 이루어진 미래 10가지, 그 가슴 뛰는 순간들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에는 작은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울먹이며 절규의 큰 소리가 되었다. 절망은 희망이라는 백신에 맥을 추지 못했고 비전이라는 주사에 환부는 가라앉았다. 단식 3일째 되던 날 아무것도 넣지 않고 끊인 배춧잎과 감자, 고구마를 우걱우걱 씹으며 삶의 맛이 무엇인지 희미하게 알게 되었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지하에 오래 묵혔던 꿈이 솟아났다. 나의 내면은 여전히 아물지 않고 있는 내 발목의 흉터처럼 흉했지만, 정신 못 차리고 주제파악 못하는 인간이라 욕먹는 걸 감수하고 부끄럽게 나의 꿈을 꺼내 놓았다. 나는 차마 놓아버릴 수 없는 꿈 하나를 불러내어 곱게 빗질해 주었다. 10가지 중 첫 번째는 이와 같다.


 

난 마치 웃는 듯 거칠게 호흡하고 있다.

기도를 하고 또 했다. 나는 간절했었고 신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의사는 다소 놀랐지만 내 왼발의 빠른 회복에 자신의 공인 듯 이내 우쭐했다.

정상에서, 내 옷은 눈이 덕지덕지 묻어 있고 난 마치 웃는 듯 거칠게 호흡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게 벌써 8년 전 이었구나. 에베레스트 pre몬순기, 4월이었다.


 

자신을 가두었던 사람은 나였다. 발목은 부러졌지만 여전히 내 등뼈는 곧추세워져 있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발목은 산산이 조각났으나 내 단단한 허벅지는 아직 부러지지 않았음을 알지 못했다. 매일의 오늘을 부러진 발목으로만 살았었다. 단 하루를 살아도 나답게 살아보려 했는가. 나에게 남아있는 날 중 가장 젊은 날, 바로 오늘, 그것을 시작하리라. 내 꿈을 세상에 내놓고 세상과 멋지게 한판 붙어 보리라.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입 속으로 오물거리던 꿈을 입 밖으로 낸 다음의 삶은 경이로웠다. 거짓말같이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꾸준한 수영 연습이 제 몫을 했는지 엉거주춤 제대로 걷지 못했던 다리가 회복의 기미를 보인다. 회복의 때가 되어 나아진 건지는 알 수 없다. 아주 가끔이지만 다시 미소가 돌아왔고 부러진 다리의 현실이 그리 혹독하지 않다는 생각이 서서히 고개를 든다. 사는 법은 죽는 법에 달려있다 했는가.



시기를 맞추어 경이로움은 또 일어난다. 그 무렵 몸담고 있는 산악회에서는 2008년 유럽 최고봉 엘부르즈 등정에 이어 6대륙 최고봉(1) 등정 계획의 두 번째 대상지로 아시아 대륙의 최고봉이자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2) 등반을 결정한다. 모두들 들떴다. 에베레스트는 산을 다니는 사람들의 마지막 꿈이다. 막대한 원정자금과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난다 긴다 하는 쟁쟁한 선배님들과 후배들이 주변정리에 들어가고 출사표를 던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자신이 원정대원 적임자임을 말했고 만나면 에베레스트 얘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그들 사이에서 내 안에 타고 있던 불씨를 드러낼 순 없었다. 조건도 되지 않고 쥐뿔도 없는 주제지만 가슴에 삭혀놓은 꿈이 몽글몽글 올라와 작은 불씨를 맞닥뜨린 떨리던 그 순간을 나는 기억한다. 흰 산, 손에 땀을 닦아가며 자세를 고쳐 앉아 뚫어져라 쳐다보던 만년설, 내 가슴을 뛰게 했던 그들의 숨소리, 눈 감으면 들리던 청량한 바람소리, 높은 준봉들을 거느리듯 서 있는 정상 봉우리들의 의젓함. 뼈가 으스러져도 차마 잊지 못했던 그들을 볼 마음에 내 속은 타 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내 다리는 부러져 있었다. 나는 곧 성급한 상상을 그만 두었다. 나보다 앞서 있는 선후배들 사이에서 내 상상을 조절해야 했다. 무엇보다 과거 4년 전 성급한 자만으로 인해 히말라야 원정을 물거품으로 날려버린 기억은 내 불씨를 차갑게 유지시켰다. 뜨겁게 타오르는 벌건 불이 아니라 파란색 불처럼 말이다. 뜨겁지만 냉정한, 한 낮에 내리쬐는 뜨거움이 아니라 새벽녘 어둠 안에서 움트는 냉정한 뜨거움. 불 끝에서 혀를 날름거리며 요란하게 춤추는 빨간 불이 아니라 불의 시작점에서 조용하고 차분하게 타오르기를 반복하는 불이 되어 있었다. 푸른 불은 벌겋게 타오르는 불과는 미세한 온도차이가 있지만 엄연히 불이었다.


 

대상지가 어디든 상관없었다. 어디든 내 한계를 넘어서는 그곳이 에베레스트가 될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내 존재를 시험할 그곳은 진짜 에베레스트가 되었지만 만년설 덮인 흰 산 어디였든지 간에 그 곳이 내 마음 속 에베레스트였을 테다. 누군가의 가슴 속에 어떤 형태로든 극복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에베레스트고 넘어서야 할 무엇인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에베레스트다. 가리라. 아주 오랫동안 나는 그곳을 꿈꾸지 않았는가. ‘불같은 화살이 내 핏줄을 타고 지나가는 것 같은’ 당황과 흥분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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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럽 Mt. Elbrus 5,642m, 아시아 Mt. everest 8,848m, 북미 Mt. Mckinley 6,194m, 남미 Mt. Aconcagua 6,962m, 아프리카 Mt. Kilimanjaro 5,895m, 오세아니아 Mt. Kalstents 4,889m 6대륙에 걸친 최고봉 산들이다. 여기에 남극 Mt. Vinson Massif 4,897m 를 더하면 7대륙 최고봉이고 남극점, 북극점, 에베레스트 정상은 지구의 3대 극지점이다. 7대륙 최고봉과 3대 극지점에 더해 히말라야 14 (8,000m 이상 높이의 14개 봉우리)까지 이 모든 걸 오른 사람은 산악 그랜드슬램에 등극한다.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사람은 한국의 박영석 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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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에베레스트(Mt. Everest, 8,848m), 2,500km에 달하는 히말라야 산맥 중 쿰부 히말라야 지역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네팔 사람들은 사가르마타(Sagarmate, 세계의 이마), 티벳 사람들은 초모룽마(Chomorungma, 대지의 여신)라 부른다. 에베레스트라는 이름은 1849년부터 영국이 식민지 인도에서 히말라야 산들의 측량 사업을 시작하며 처음엔 ‘peak b’로 명명했다가 1850년에 ‘peak h’ 이후 ‘peak 15’로 이름을 바꾸어 불렀다. 1852년 이 산은 해발 8,840m로 측량되어 세계 최고봉임에 증명되었고 1865, 당시 측량 사업에 평생을 바친 영국인 조지 에베레스트 경의 이름을 따 산의 이름으로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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