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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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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18일 19시 33분 등록

쓸모라는 농담

 

시골 가서 농사나 짓고 살지 뭐.

농사지을 땅은 있소? 농사가 얼마나 중한 노동인데 아무나 하는 줄 아시오?

방금 너도 봤잖아. 설마, 여기보다 힘들라고.

 

그의 상사는 그를 두고 쓸모없다는 시그널을 오래전부터 보내왔다고 했다. 오십 줄을 바라보는 나이의 그는 뭘 그리 잘못했는지 그 언저리 비슷한 연배인 임원에게 요새 늘 닦인다. 언제부턴가 아랫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를 무시하거나 언성을 높이는 일이 잦아졌다. 그는 부쩍 힘들어했다. 20년을 훌쩍 넘긴 월급쟁이 경력에 웬만한 지랄에는 끄떡없는 맷집을 가진 그다. 상사의 고함이 그를 힘들게 했을 리는 없다. 아니나다를까 그가 힘든 이유는 쓸모없는 인간이 됐다는 자각이 점점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스스로의 믿음이라 했다. 위로한답시고 했던 이런저런 말끝에 시골 가겠다는 월급쟁이 뻔한 거짓말이 나온 것이다.

 

그를 위해 기꺼이 이 글을 쓴다. 그가 쓸모없다고 여기는 자각이야말로 쓸데없는 것이며 우리가 결국 쓸모를 잃고 버려지게 되는 이유는 그와 우리의 잘못이 아님을 밝히고자 한다. 갈려지고 버려지는 월급쟁이들과 함께 크리스마스이브의 스크루지 영감처럼 그의 손을 잡고 18세기 영국으로 간다. 김 차장님, 꼭 잡으세요.

 

상업의 발달로 상품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시장엔 신기한 물건들이 넘쳐나고 거리엔 사람들이 넘쳐난다. 메트로폴리탄이 탄생하는 시기, 이른바 산업혁명으로 전에 없는 매뉴팩처 번성이 눈을 뜨던 때다. 땅에서 솟아난 듯 인구도 늘어났다.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던 상품은 필수품이었던 양모 가격의 급등을 부추겼고 지주 귀족들은 공유지’(당시 농노의 땅이었던 농지가 1/3, 영주의 땅이 1/3, 공유지가 1/3이었다)와 농노들의 땅에 양을 키우기 위해 울타리를 쳐버린다. 저 유명한 인클로저 enclosure, 울타리 치기다. 땅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도시로 흘러든다. 때맞춰 도시 공업지역의 노동수요가 폭발하며 노동대중을 양산해 내는데 18세기 영국, 길 잃은 농노들의 도시향이 바로 오늘 월급쟁이의 조상이다. 그 배고픔과 고단함이 월급쟁이 종족들의 물적 토대다. 문제는 여기다.

 

도시로 몰려든 농민들 중에는 전통적인 삶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으로 엄격한 규율 아래 가혹한 노동을 수행하는 공장 생활을 거부하고 걸인이나 부랑자 생활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국가는 부르주아의 이해를 대변하여 이 역사의 훼방꾼들을 냉혹하게 처리한다. 구빈법 poor law는 노동능력이 있는 걸인이나 부랑자가 적발되면 공개 태형에 처하고 감옥에 가두고, 귀를 자르고 죽이도록 했다. (근면과 절약의 덕을 갖춘 존경할 만한 시민으로서의 자질이 결여된 사람으로 낙인 찍었다) 대개의 사람들이 노동자로 살아가는 일을 너무나 당연히 여길뿐더러 다만 안정적이기만을 소망하는 세상은 그렇게머리에서 발끝까지의 땀구멍에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태어난다.’’(김규항 혁명 노트에서 인용함)

 

지금 당연히 여기는 월급쟁이들의 근면과 성실의 쓸모는 사실 이때의 가혹한 처벌과 강요가 만들어낸 괴물의 자식이다. 비노동은 반사회였고 반사회적 인간은 무용하다는 생각이 이때부터 생겨났던 것이다. 인간은 쓸모로 재단되기 시작했다. 쓸모 없는 인간은 짓이겨 버려지고, 쓸모 있는 인간들은 소모되어 버려진다. 쓸모가 있든 쓸모가 없든 쓸모로 인해 버려졌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적당히 사무적이되 친절해야 한다. 자본주의 매너를 몸에 두르고 앉아 자신의 쓸모를 끊임없이 드러내 보여야 스스로도 안심하고 남들도 인간 취급을 한다. 모두가 불행으로 폭주한다. , 우리는 광범위한 불행에 빠진다. 그 불행은 시간의 부피를 가지고 있어서 오늘 김 차장의 행복하지 못했던 기분은 내일과 모레도 다르지 않을 거라는 걸 우리는 안다.

 

노동은 신성한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인류의 가장 신성해야 할 사람은 노예였어야 했다. 삶을 떠받치는 건강한 노동? 그런 건 믿지 않는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뼈빠지게 일하는 모든 사람은 삶의 벼랑으로 떨어지거나 죽지 않았어야 했다. 거의 모든 영역에서 노동은 누군가 시켜서 하는 일이 되었다. 거의 모두가 누군가의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어렵게 됐다. 반대로 내가 나의 일을 하면 먹고 사는 게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일을 하면 자유로운 인간은 포기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거칠게 말하면 남의 일을 해서 영혼이 죽든지 나의 일을 고집해서 굶어 죽든지 일 하는 사람은 어쨌든 죽게 되어 있는 게 이 시대 세팅 값이다. 어쨌든 죽는다. 시대와 구조가 만든 그러니까 세상의 쓸모를 향해 어릴 때부터 강요 받고 죽을 때까지 돌진한다.

 

가끔 누군가 이런 상황에 환멸을 느껴 모든 걸 내던지고 느리고 생태적인 삶으로 돌아가려 한다. 시골의 전원적 환경과 이 미친 쓸모에서 놓여나는 해방감을 선택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마저도 한 평생 얼마간 벌어놓은 잉여 재산이 있는 사람들의 얘기다. 없는 사람이 시골에 내려가 느리고 생태적 철학을 구현하고 산다면 시스템의 적정한 처벌로당장 생존의 위협부터 당할 테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저 역사적인 쓸모의 파놉티콘에서 풀려날 수 없다. 그러나 노력했지만 취업이 되지 않는다고, 오래 다닌 회사에서 쓸모 없어졌다고 자신을 책문해선 안 된다. 그것은 나의 잘못도 아니고 우리의 잘못도 아니다. 나 아니면 누군가 그 형태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게 만들어 놓은 시대의 디폴트 값이다. 다만, 언젠가, 김차장님아, 거지 같은 쓸모를 누군가 시부렸던 싱거운 농담처럼 개무시하고 농사가 됐던 고기잡이가 됐건 목수가 됐건 나만의 일을 찾아 그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인간의 길을 가게 되기를 힘겹게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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