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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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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31일 23시 59분 등록

[늦은 월요편지-내 삶의 단어장]

발견과 발명에 대한 고찰

 

  

  청소년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한다지만 내게 있어 그 때는 더할나위 없을만큼 냉정하고 차분했던 시기였다. 나이가 들면 ‘철’이 든다고 하지만 난 ‘철’은 절대적 총량의 법칙으로 특정한 시기에 웬만큼 형성이 되고 나면 그 이후는 더더욱 강해지지 않는 영역이라고 인식하곤 했다. ‘철’이란 무한정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시점에 정점을 찍고 나면 더 이상 오르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는 거라고. 결국 일찌감치 철든 아이는 그 상태로 이어져 나이가 들게 되고,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철든 사람과 ‘철’의 쌓임이 같아진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릴 적보다 깊은 사고와 행동이 옅어지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아이처럼 살지 못한 채 무거운 철을 푹푹 가슴에 담아댔던 어린 시절에 대한 애잔함이 샘솟곤 한다. 이미 총량이 축적되어 오랫동안 철없음과 모자람으로 살아와야 했던 많은 나날에도 안타까움이 인다.

  기억나는 폭풍같은 나의 반항은 ‘신’을 향해서였다. ‘반항’이라는 말이 적절치 않지만 한 수 접고 들어가서 그렇게 말하련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아닌, ‘신’을 향한 지속적인 반감은 조반니노 과레스키의 소설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속 패포네와 돈 카밀로 신부처럼 유쾌함과 유머가 깃든 대화 형태가 아니었다. 성경구절 하나하나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따지는 일방적인 형태의 물음들이었고 아무도 답해 주지 않는 질문의 핵심은 ‘자유’였다. 청소년기에 생각할 수 있는 흔하고 뻔한 물음이었겠지만 당사자에게는 언제나 심각한 일이기에,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는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인듯 미간을 찌푸리며 하루하루를 살게 만들었다.

  그건 ‘신’과 결부되어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에 결국 나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건가, 생각하기도 했고 ‘신’으로부터 내 삶이 결정된다는 것을 참을 수 없어했다. 결국 자유의지란 없는 것에다 신의 테두리 안에서 누릴 자유, 결국은 속박되는 삶의 연속이란 생각으로 청소년으로서 누릴 수 없는, 제한된 삶에 대한 반항이었을 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성경 구절구절마다 모순적이고 관용없는 행태에 대한 지적질과 성경 구절이 인간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이다라고 하는 해석에 대한 반대였다. 성경에 대한 해석을 들려주고 줄곧 ‘주’와 함께 하는 삶으로 나를 인도하고자 한 친구는 매번 수긍하지 못하는 나의 외침에 지쳐가며 그러한 질문들을 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답을 구하는 것이 더 좋을 거라고 얘기하며 제 교회로 나를 이끌었다.

  천국과 지옥행에 관해 지독한 비난을 퍼부은 뒤의 일이었던가. 고려시대 사람들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기독교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신’을 믿지 않아 지옥에 가게 된다는 것을,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신’을 모른다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을 수긍할 수 없는 ‘나’의 불쾌함이 폭발적으로 발산되고 나서였고 그 폭발이 못내 미안해 나는 몇 번 교회를 방문했고 특별히 야유회에도 참석했다.

  온 동네 초록초록 풀들이 가득하던 5월이었다. 구약과 신약 속 등장인물의 계보를 그려가며 나름 성경책도 소설책 보듯 읽고 무려 성경암송대회 출신임에도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내가, 그 푸르른 5월의 들판을 보며 ‘적대적이지 않은 물음’을 ‘그냥 그들의 모습을 보고 듣고 있기’로 마음을 추슬렀다. 내 비록 지옥행이 확정되었다 한들 남의 잔치에서 계속 뿔난 모습일 수는 없으니까.

  허나, 그날은 내가 절대적으로 수긍할 수 없는 것에 완벽히 멀어질 준비를, 깔끔하게 헤어짐을 고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날이 되었다. 낯선 이에게 다가와 그들의 친절한 ‘전도’를 위해 모여든 누군가와 친구와 마주 선 자리에서 몇 마디 근황에 대해 주고받은 후의 잠시의 침묵 속, 친구가 말했다.

 “오빠, 참 신기하지 않아. 어떻게 이런 것이 만들어졌을까?”

 “뭐가 신기해. 다 하나님이 만드신 건데.”

들판에 나풀거리는 풀잎 하나에 큰 감흥에 젖어 있던 친구의 말에 풀잎을 꺾어 하나씩 하나씩 잎사귀를 뜯어내며 그 교회 오빠는 말했다. 곧 이어진 말은 쉬이 잊혀지지 않을 만큼 강력한 한방을 선사했다.

 “인간들이 발명이라고 하는데 그 말은 맞지 않아. 발명했다고 하는 그건 모두 발견일 뿐이야.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이제야 발견하는 거라고!”

  발견과 발명이란 단어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해석. 그 신념과 믿음에 대해 내가 딱히 할 말은 없었으며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친구와의 대화가 공허할 수밖에 없었던 건 결국 전제하는 바가 달랐던 것 때문이고, 그 근본적인 신념과 믿음의 문제로 되돌아가면 나는 결코 발견과 발명에 대한 그의 해석에 동의할 수 없으므로 나는 ‘신’을 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종류의 형태로든 죄지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것이고 누군가 혹은 무엇엔가 절대적인 의지를 하고 싶을 때가 있을 지라도 그것이 결단코 ‘신’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지 않으리라는 것. 그리고 내 삶에서의 두려움은 지옥행으로 갈 것에 대한 두려움은 아닐 것이므로.

  제 삶의 안녕을 위해 갖게 되는 신념에 타인이 뭐라고 왈가불가할 수 있겠느냐만, 어떤 이의 신념은 타인의 삶을 지옥으로 빠뜨린다. 2023년 하루하루, 이것을 발견하고 있지 않나. 이것이 누군가 정해놓은 것이라는 걸 난 받아들일 수 없다. 타인의 삶을 고통 속으로 밀어넣는 누군가의 신념이란 믿음이란 충분히 왈가불가할 꺼리가 되어야 한다. 발견과 발명이란 단어는 오랜 시간 내게 누군가의 신념에 대해 무심한 수긍이었지만, 내가 다가갈 수 없는 세계였지만, 요즈음 세상을 보며 생각한다. 마냥 무심할 수 없는 어떤 신념을 발견하게 된다면,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위한 발명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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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2 22:29:07 *.169.54.201

배움과 경험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겠지만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는 바라보는 관점(일체유심조)에 따라 다르고 그에 따라 행동(발명)도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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