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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14일 13시 05분 등록
안녕하세요. 한 주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이번 주 편지는 ‘시어머니와의 에피소드’를 준비했습니다. 가족 문화를 바꾸어 보겠다고 생각하게 된 최초의 일화를 나누겠습니다.

2011년 1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2010년 12월에 직장 생활을 마감한 저는 처음으로 대낮에 집에서 머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 손으로 사직서를 쓰는 일이 제 인생에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경추와 요추가 이탈하면서 두 팔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일을 할 수 없는 몸 상태가 된 것입니다. 진통제를 먹어도 통증이 계속 되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수 없으며 의자에 제대로 앉아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제 손으로 사직서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수술보다 치료를 권했습니다. 주사와 약, 물리 치료와 도수 치료를 병행하기로 했습니다. 처음 3개월은 무조건 매일 병원 방문 치료를 하고 이후에는 일주일에 세 번에서 점차 줄여나가는 방법으로 1년 동안 길게 보고 고쳐나가자고 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뭐라고 하시건 저는 아이들이 보고 싶었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가장 먼저 시댁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당시에 일곱 살과 세 살이던 두 아이가 올라오고 나서 바로 시어머니와 시아버님께서 저희 집으로 오셨습니다. 차 트렁크에서 큰 상자를 들고 들어오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큰 상자를 거실 한복판에 내려놓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제 쉬니까 애가 생길 수도 있잖니?”

상자에 임부복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동안 입을 수 있도록 임부복이 여러 벌 새 옷처럼 세탁되어 가지런히 개켜져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웠지만, ‘직장을 그만두었으니, 이제 아들 낳아서 대를 이어야지!’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전해져 왔습니다.

직장을 그만 둔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고 1년 동안 치료를 계획하고 있었던 터라, 머리가 아팠습니다. 두 팔을 제대로 못 쓰는 상태로 임신하고 출산하는 게 가능할까? 이제는 외벌이인데, 다자녀를 양육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시어머니께서 ‘아들, 아들’ 하셨던 적이 없었기에, 저는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얘야, 내가 시집와서 네 남편 낳기 전까지 두 다리 뻗고 잔 적이 없잖니? 친정도 맘 편히 한 번 못 다녀왔다? 시어른들이 아들 못 낳는 며느리 집으로 돌아오지도 말라고 하실까 봐……”

“얘야, 며느리가 아프다고 진짜 아프다고 말하면 되니? 시댁에서는 그러면 안 돼. 아파도 꾹 참고 자기 할 일 하는 거야. 낮에는 식사 챙기고 청소만 해도 하루가 다 가지. 밤에는 식구들 구멍 난 메리야스 양말 꿰매면서 시간 보내는 거야. 제사는 오죽 많니? 몸 아플 시간이 어디 있니?”

임부복 상자를 앞에 두고서 제사 준비할 때 부엌에서 어머니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때는 ‘고생 많으신 우리 어머니, 이제 좀 편하게 사셨으면…….’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어머니께서 저에게 그런 삶을 살라고 하신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긋지긋한 가부장제 여성의 노동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였습니다.

다음 날부터 어머니의 작은 수업이 시작됐습니다. 아침 식사를 차려드리고 나면, 이불 깔고 개는 법부터 옷 개는 법과 옷장 정리하는 법, 칼 갈고 칼 쓰는 법과 나물 다듬고 나물 무치는 법 등 하나하나 어머니의 방식으로 교정하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얘야, ‘친정에서는 이렇게 했는데요’라고 하면 안 된다. 시댁에서는 시댁의 방식을 따라야 하는 거야.”

하루아침에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제가 가부장제의 일꾼의 자리에 서게 된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정말이지 그 대열에서 이탈하고 싶었습니다. 제게 두 아이가 없었다면 아마 그 순간 짐을 쌌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한때 그런 아이들 중 하나였다. 운동장 조회 시간에 일렬로 신발주머니의 줄을 맞추고, 친구들이 일사병으로 하나둘 쓰러져나가도 부동자세로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던 아이. 수련회에 가서 유사 군사 훈련을 받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국가에 충성하고 여자로서 순결을 지키며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다나까’로 말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던 아이.
그런 내가 하고 싶었던 건 개인행동이었다. 그 반듯한 줄을 탈출해서 멀리로 달려나가고 싶었다. 운동장에 줄을 선 신발주머니들로부터 국가에 대한 경례로부터, 야, 51번, 차렷, 열중쉬엇, 앞으로 나란히, 앉아, 일어서, 앞으로 나와, 싸가지 없는 년, 너희 부모가 돈이 없어서 이런 동네에 살지, 뭐, 너 같은 게 뭐가 되겠어? 지껄이는 입들과 너무 가벼운 손찌검으로부터 멀리, 아주 멀리로 가고 싶었다. 개인행동을 하고 싶었다. 나의 개인행동은 아무도 해치지 않으리라 믿었다. 나는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사람이 주는 고통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몸으로 느꼈으니까.‘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작가의 말 중에서)  


나의 몸에서 경추와 요추가 이탈하고, 대한민국 여성으로서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고서 산업의 역군의 자리에서 이탈하고, 내 동의 없이 나의 자리가 가부장제 일꾼이란 자리가 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개인행동이 너무나 하고 싶어졌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그 순간까지, 오직 시어머니를 위해 가족 문화를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를 위해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온 것이었습니다.  

다음 주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습니다, 열일곱 번째 이야기’에서 ‘시어머니와의 에피소드’를 이어서 들려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정은(toniek@naver.com)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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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5 12:53:40 *.36.137.238

이렇게 아픈 기억이 있었군요.


어르신들이 새로운 변화의 중심에 서서 바꿔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집도~~~ 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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