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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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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15일 10시 54분 등록

장대비 내리던 어느 주말 오후

 

바야흐로 우기가 시작됐다. 이곳은 계절이 없다. 서늘한 여름과 무더운 여름만 있다. 서늘한 여름엔 비가 내리지 않고 무더운 여름엔 매일 오후 장대비가 쏟아진다. 비 내리지 않는 여름은 지구 최고의 날씨를 자랑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의 기분 좋은 날씨가 될 텐데 보통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4개월간 지속된다. 지금 동남아 일대는 우기에 해당하는데 비 내리는 여름이다. 매일 한 번씩 내리는 장대비에 속수무책 당할 때가 많지만 시원하게 한번 내리고 나면 대기는 상쾌하고 무더위는 한풀 꺾인다.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가 내려다 보면 비구름이 다가오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장관이다. 회색 구름이 파란 하늘 한중간을 떠돌며 비 내리는 곳과 비 내리지 않는 곳을 극명하게 가른다. 전에 없던 경관이다. 거대한 비구름을 만들고 지각을 비틀고 육지와 바다를 관제하는 지구의 일을 엿보는 느낌이다.

 

주말 한가한 오후, 장대비가 두드린다. 빗소리를 들으러 마당구석으로 나가 자리를 잡았다. 떨어지는 비에 붉은 개미들은 혼비백산이다. 푸른 도마뱀이 길목을 지키며 긴 혀를 뽑아 개미들을 가로챈다. 열대 지방 커다란 파초 잎에 후두둑 비 때리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 앉는다. 이태준은 자신의 수필집 무서록파초라는 글에서 여름날 서재에 누워 파초 잎에 후득이는 빗방울 소리를 들을 때 가슴에 비가 뿌리되 옷은 젖지 않는 그 서늘함이라 말했다. 기가 막힌 표현에 무릎을 치고 서재가 마당으로 바뀐 동일성에 감탄한다. 가슴에 비를 맞으며 수필가 글빨을 저울질하는 주말 오후의 호사다.

 

빗소리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동공이 풀린다. 시선을 한 곳으로 고정시키고 생각을 지운다. 그 사이 막내는 곧 사라질 비를 맞아 보겠다며 마당 한가운데로 뛰쳐나간다. 제자리에서 양팔을 벌리며 돈다. 아이가 부럽다. 파초 잎과 저 아이가 문득 동질적인 원형을 나눈 같은 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오른 생각이 어디서 본듯하여 희미한 단서로 한참을 더듬어 찾으니 아하, 조셉 캠벨이었다.

 어느 날 해변을 걷던 중 나는 신기한 경험을 목격했어요. 황소 모양의 원형질이 풀 모양의 원형질을 먹는 것 같았고 새가 물고기를 잡아먹는 광경도 새 모양의 원형질이 물고기 모양의 원형질을 먹는 것 같았어요. 많은 사람에게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이런 놀라운 심연 체험이 있을 겁니다.’ (신화의 힘 에서)

 

내 생각은 캠벨이 예견한 심연 체험이란 말인가. 아서라, 너무 오래 멍을 때렸다. 아이와 파초의 동질성은 심연 체험 같은 신비로운 일탈 경험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차라리 태어나 삶을 살아야 하는 생명으로서의 자세다. 많은 제약과 조건들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자세, 말하자면 긍정의 삶을 살려는 의지 같은 것. 비를 맞고 스스로 커가는 파초처럼, 장대비를 맨몸으로 맞으며 춤을 추는 아이처럼, 삶은 그런 신성한 긍정이 추동한다. 썩은 얼굴을 하고 이곳 저곳을 정신 없이 다니는 바쁜 삶이 아니라, 사무실 모니터를 지켜보는 무채색 삶이 아니라, 맞닥뜨릴 두려움에 초라한 시민성으로 사는 옹졸함이 아니라, 인화성 짙은 일들을 애써 피해가며 금욕주의적 삶을 산다 자위할 것이 아니라, 몸으로 비를 맞고 뛰며 소리지르는 푸른색이 내 삶에 물들 때까지 살아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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