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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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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9일 01시 56분 등록

내가 사랑한 치앙칸

 

한가한 거리에 햇빛 쏟아지는 테라스에 앉는다. 30분에 한마디씩 천천히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시간은 여유롭다앞으로는 큰 강이 흘러흘러가는 강처럼 시간을 놓아흐르게 놔두면 내 목에 걸린 목줄은 사라진다여유의 여유조차 잊는다두어 시간을 그렇게 앉아 있어도 어색하지 않고 이상할 것 없는 사람과 즐기는 단아한 하루혼자여도 상관없다이런 하루가 쌓이면 인생에 갑이 된다빌어먹을 회사의 중장기 전략을 책상 끝으로 밀쳐 내고 나는 떠났다없는 시간을 쪼개서 억지로 가는 여행이 아니라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시간을 움켜 쥐고 떠나온 치앙칸그곳에서 움켜 쥔 시간을 하고 한번에 내려 놓았다.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과 태국은 접해 있다태국 쪽 접경 도시 농카이에서 북서쪽으로 170km 떨어진 곳에 치앙칸이라는 조그만 도시가 있다업무시간에 구글 맵에서 봤다강을 사이에 두고 라오스와 접한 마을이었다지도에서 찍고 차로 무작정 달렸다가는 중에 날씨는 세 번이 바뀐다차 앞 유리가 부서져라 내린 폭우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맑아졌고 뜨겁게 내리쬐던 태양은 숲을 지나며 서늘하기까지 하다아이들은 픽업 차량 짐칸에서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함성을 지르고 발을 구른다언제부턴가 덮어놓고 내달리는 여행의 맛을 알아버렸다라오스와 태국 인근 지역을 여행할 때면 숙소조차 미리 정하지 않는다몸 뉠 곳 없을까 하는 태연한 긍정과 우연에 대한 활짝 열린 마음은 여행자의 스피릿이다도착해서이리저리 둘러보며 묵을 곳을 찾는 재미는 생략할 수 없는 여행의 묘미다마음에 드는 숙소에 들어가 창문을 열어보고 내일 아침 떠오르는 해를 상상한다지는 노을의 방위도 가늠해본다숙박비가 턱없이 비싸면 흥정도 하며 주인의 됨됨이를 알아채 보려 노력하고 이곳 사람들의 재미있는 말투와 손짓도 흉내 내본다말도 안 되는 값을 부르고는 악수를 시도하면 주인으로부터 너 같은 놈 처음 본다는 시선을 받는다지드래곤을 좋아한다면서 못이기는 척 넘어갈 듯하다가도 결국 깎아주지 않는 모진 주인을 만나면 다시 내가받았던 시선을 돌려준다여행이다외국생활의 고단함은 이런 즉흥적이고 계획 없이 떠나는 여행으로 눈 녹듯 녹아 내리는 경우가 많다치앙칸은 완벽하게 불완전했다그래서완벽했다.

 

메콩강을 경계로 길게 늘어선 아름다운 산책길이 인상적인 마을이다비수기이고 아직 널리 알려진 도시가 아니라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태국 사람들이 즐겨 찾는 자국 관광지라 들었다이 정도면 외국인 배낭여행객들이 환장하고 덤벼들 마을이다의외로 한산하다한산한 작은 시골도시길 한 가운데를 다니며 시간의 부피를 가늠하면 천천히 걸었다조용하다아름답다칵테일을 잔 채 들고 아기자기한 골목을 돌아다녔다허리띠를 풀고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걷는다가끔 하는 헛소리에 아내에게 뒤통수를 살짝 맞기도 한다가슴팍 단추 하나를 풀어헤치고 걷는 낯선 길조금 취하면 어떤가가끔 들려오는 음악에 엉덩이를 흔들었다아이들이 손가락질 하며 웃었다이내 웃으며 따라 한다아이들은 아이들 대로 좋아하고 어른들은 어른 대로 좋다지나는 길에 기발한 먹거리를 보면 한참을 구경한다아이들이 사달라 졸라대면 실랑이 끝에 마지못해 사준다방금 시끄럽던 아이들은 먹느라 조용하다입은 긴 꼬챙이에눈은 앞서 걷는 엄마에 고정시키며 곧잘 따라붙고 있다그 모습을 힐끗 돌아보곤 아이들이 언제 저렇게 컸냐며 달인 웃음을 웃는다여행이다새 파란 하늘에 미켈란젤로가 그렸을 법한 구름강물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작은 배흙탕물 가득 싣고 떠내려가는 어머니의 강메콩테이블엔 가득 따른 맥주잔그 위로 떨어지는 거대한 오렌지빛 태양시간아멈추어라.

 

앉은 자리가 편해 길게 앉았더니 고개가 젖혀 진다땅거미가 앉았다하늘을 보니 빽빽하게 빛나는 별들이 얼굴로 쏟아진다순간 나의 물리적 시간도 철퍼덕 드러눕는다나는 드디어 놓여난다꽉 쪼여진 건 죄다 갑갑하다마음을 콱 쑤시는 말들흥행과 유혹만이 넘쳐나는 세상이다해야 할 것들은 겁나게 많고 하고 싶은 건 단 하나도 못하게 한다씨바징그럽게 일했다돈이라는 건 원한다고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다잡을 수 없는 돈을 좇다 보니 원하지 않는 것을 배우게 되고 하기 싫은 일을 하게 되고 누군가가 시킨 일을 하며 살게 됐다어쩔 수 없는 삶의 강물이 나를 이리로 이끌었다 하더라도 어쩌겠는가야비하게 질문 뒤에 숨지만은 말자질문을 붙들며 살다 보면 언젠가 이 여행처럼 우연의 모습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는 나의 노동이 찾아오겠지그리 믿어라지난한 삶시시한 삶지겨운 삶에 대한 분노를 애써 숨기지만 않으면 된다잊지 마라비 내리는 구름 위엔 언제나 눈부신 태양이 밝게 내리쬐고 있음을밤이 깊어간다.

 

만만치 않은 외국생활을 온 도시로 위로해 준 치앙칸에게 감사하다이제 왔느냐며 안아준 치앙칸이 고맙다세상엔 나만 숨겨 두고 보고 싶은 곳이 몇 군데 있다사람들에겐 알리지 않으마돌아오는 길 도로에서 파인애플을 샀다. 100바트 그러니까 우리 돈 3천원에 내 머리통만한 파인애플을 아저씨는 어쩌자고 담고 또 담는가남는 게 있을까 싶을 때 10개를 담고 더는 담을 수 없어 포기한다내 몸이 들어갈만한 대형 광주리치앙칸을 그대로 들고 온 듯 풍성하다이웃집 할아버지 댁 현관에 몇 개를 걸어놓고 나눠 먹었다어찌 이리 달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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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31 23:03:21 *.149.22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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