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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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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17일 11시 23분 등록

세상의 가운데로 보낸 자기유배


전기가 나가는 건 다반사다. 라오스에선 단수斷水는 흔한 일이다. 그럴 때마다 할 수 있는 조치라곤 고작 주인집에 연락하는 것 말고는 별 수가 없는데 주인집에서도 기다려 보라는 말 외엔 딱히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게 2 3일을 전기 없이 또는 물 없이 견디고 나면 한국이 그리워진다. 비로소 내가 주변에 있음을 실감한다. 중심강박이야 없지마는 양지식물처럼 해외에 있으면서도 늘 한국을 보며 살았으니 변방에 있다는 역외감, 경계인의 마음은 갈수록 더해 갔던 것이다. 외국에 있어 이 곳에 좋은 점을 찾거나 태어나 살았던 나라의 잔인함을 발견하려는 태도는 여전히 나는 한국에 살고 있다는 말이겠다. 한국을 벗어나 산다는 것은 한국을 잊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수적인 건 아니다. 외국에서 삶의 터전을 잡고 살면서도 생각과 사고의 기준이 사사건건 한국의 그것과 비교하는 건 여전히 이 곳은 내 삶에 중심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 나는 여전히 한국을 벗어나지 못했다. 생각을 이어가다 도대체 주변은 무엇이고 또 중심은 어디인가에 대해 부러뜨려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잠시 지구 밖으로 다녀온다


지구에서 가장 가깝다는 별 프록시마에서 세어 나오는 빛은 4.24광년이 걸려 지구에 도달한다. 그 빛은 인간의 시간 이전에 프록시마에서 이미 출발했다. 가늠조차 힘든 장엄한 시간의 속내야 알겠냐마는 중심을 이해하는데 실마리가 되리라는 촉이 섰다. 스스로 태워 빛을 내는 것이 별이니, 사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은 태양이다. 아시다시피 우리가 보는 태양은 늘 8분 전의 태양이다. 태양은 우리 은하계 중심에서도 한참 떨어진 변방에 있고, 지구는 변방의 태양으로부터 다시 얼마간 떨어진 행성이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일까. 아니다. 그렇다면 우주의 중심은 어디일까. 알 수 없다. 우리는 우주의 중심이 어딘지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곳이 중심일 수 있다. 그래서 우주의 중심은 어딜까 라고 묻고 있는 내가 지구에 있기 때문에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중심은 늘 가변적이다


해외에 나와 살겠다 마음을 먹고 김해를 떠나오던 날, 날씨가 그렇게 좋았다. 늦여름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높이 걸린 적운이 선명하게 보이는 날이었다. 떠나기 좋은 날이었다. 어찌하여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3년을 채우게 됐다. 화장실이 어디냐는 말을 하지 못해 당황했었고 손짓 발짓을 곁들여 어눌한 말이라도 할라치면 상대방은 더듬더듬 말하는 나를 아이 보듯 했다. 그렇게 어린아이가 되어 살아야 하나 싶었다. 좋게 말해, 다시 사는 새로움이지만 지난 삶에서 이루었던 대부분을 부정해야 하는 무참함이었다. 내 삶을 스스로 뒤집어 보는 시도, 정상이 비정상으로 바뀌는 역설, 내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다시 알게 된 시간이었다


덕분에 경계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떠난 자는 떠나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곳에 있었을 삶을 늘 생각한다. 한국을 떠나 사는 한국인들은 종종 자신을 경계에 있다거나 경계인이라는 표현으로 비주류임을 각인한다. 경계는 그럴 때 쓰는 용어는 분명 아닐 텐데 종족과 국가를 떠났다고 해서 한 인간의 존재가 중심이 아니라 경계가 되어버리는 관념은 여전히 존재하는 영토강박이며, 또 다른 민족주의, 국가주의는 아닐까 하며 앞서 나가본다. Axis mundi, 세계의 축은 바로 자신이 서 있는 이 자리다. 내 삶이 전개되는 여기가 긴 생의 도정이 시작되는 곳이다. 단테 알리기에리는 피렌체가 고향이다. 서른 일곱 살에 고향에서 추방되어 20년 가까이 객지를 떠돌다 라벤나에서 죽었다. 고향으로 돌아오라는 제의에 그는

"그 어디에 있건 나는 태양과 별빛을 볼 수 있다. 불명예스럽게 아니, 치욕적으로 사람들과 조국 앞에 서지 않고도 그 어디서나 고귀한 진리를 생각할 수 있다...세계 전체가 내 고향이다".

라고 답했다. 단테의 '신곡'은 떠나있던 20년간의 고뇌이자 깨달음이었다. 추사체를 완성한 완당은 제주 유배지에서 조선 최고의 그림 세한도를 그려 냈다. 그리스가 배고픈 육지를 떠나지 않았다면 인류에게 민주주의 경험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산은 어떤가, 강진 유배에서 제자들과 만든 저작들은 다작이기도 했거니와 혀를 내 두를 정도로 척척 맞는 호흡으로 조선 말 지혜의 중심이 됐다. 이쯤 되면 스스로를 추방하여 경계인이 되어 볼 일이다. 한 줄기 바람으로 떠나 세계의 끝에서 세계의 중심을 가늠해 보는 것, 무리의 편안함을 버리고 자기 유배를 통해 세계의 중심이 어딘지를 다시 생각해 보는 건 나쁘지 않아 보인다. 떠나기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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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8 18:41:51 *.212.217.154

자신이 있는 그곳이 곧 세상의 중심.

결국 세상사 마음먹기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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