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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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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25일 19시 25분 등록

천태(天台), 이름에 하늘을 담은 자

(양산 천태산)

 

떠나지 못한 모험은 삶에 대한 쓰라린 모독이다.’ 구름이 세탁세제에 빤 듯한 날, 대지는 뜨겁고 아스팔트는 녹아 흘렀다. 한 걸음을 떼면 굵은 땀이 떨어졌고 마른 땅에는 흙먼지가 풀풀거린다. 길 나서는 이들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날씨지만 언젠가 취해보리라 벼르던 천태산에 안긴다. 지난 날, 천태 슬랩을 무거운 등산화로 암벽등반을 했었다. 팔을 쫙 뻗어야 하는 핑거 홀드를 향한 춤사위가 기억에서 살아난다. 힘들게 수직의 바위를 오른 뒤 시커먼 땟물과 피투성이로 떨어대던 손가락, 그 위로 떨어진 묵직했던 땀방울이 아직도 나를 지배하는 곳, 오금은 들썩이기 시작했다.

 

천태산으로 가는 많은 길 중 천태사를 들머리로 정했다. 천태산은 천태산통천제일문’(天台山通天第一門)을 거쳐야 맛이다. 산으로 들어서는 순간, 매미 울음이 귀청을 때리더니 급기야 산 전체의 매미가 고함치듯 울어댄다. 시끄러운 중에 매미의 지극했던 땅속 고요의 시간을 상상했다. 지상에서의 몇 일을 위해 수 년 간 암흑에서 버텼던 매미는 여름이 가면 모두 죽는다. 여름은 매미의 죽음을 관통하고 우리는 천태사를 가로 질러 산으로 들어선다.

 

천태사를 지나자마자 길은 사납다. 추연폭포 (국토지리정보원에 따르면 추연’(椎淵)으로 표기되어 있고, 양산시 그리고 현장에서는 용연’(龍淵)으로, 일부 사람들은 웅연으로 부르는데 어떤 지명이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상단에 이르면 경사는 잠시 수그러들고 아기자기한 계곡도 이때 만난다. 20여 미터 되는 폭포 상단에는 두 개의 작은 소가 있는데 보는 사람이 없다면 알탕?하기 좋은 곳이다. 뭇 선녀들의 이야기가 내려옴 직한데 관련된 설화는 찾을 수 없었다.

 

내리 꽂히기 직전의 계곡물로 한가하게 족욕할 수 있는 경험하기 힘든 선물을 선사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진짜 쉰다는 걸 게다. 양말을 벗고 허연 발을 푸른 물에 담근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조망이 아찔하다. 우측의 큰 기암들과 정면으로 시원하게 뚫린 낙동강변, 김해 무척산 전경이 어우러져 자칫 오르려는 욕망을 접고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할 지 모른다.

 

그해 여름은 비 같은 비 한번 내리지 않아 그야말로 마르고 뜨거웠다. 그래선지 생각보다 계곡의 유량이 많지 않았는데 지난 밤 소나기에도 추연의 물줄기가 중년남성 전립선염 앓는 듯하다. 그러나 이 산의 여름 매장량이 다해 갈 때쯤, 이내 깊이 품었던 물을 뿜어내며 맑디 맑은 물을 흘려보낼 것임을, 찔찔 흐르던 물은 온 산에 철철 넘쳐날 것이고 그때는 천태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될 것임을 안다.  

 

천태산(630.9m)은 자신보다 높은 남동쪽 664(664봉의 정상은 삼각점을 지나칠 정도로 평탄하다)을 압도하듯 거느린다. 산군(山群)에서 최고봉을 제쳐두고 중심의 산으로 명명되는 예는 보기 드문데 그 면모가 다분히 쿠데타적이다. 한편으로 생각건대 높이에 연연해 하지 않고 큰 물(천태호)까지 아우를 수 있는 리버럴이 아닐까 한다. 뿐인가, 낙동강 동쪽에서 신불, 영축, 천성, 금정 등의 큰 산들은 죄다 정맥에 섞여 바다로 돌진하는데 천태는 이를 시기하지 않고 끝까지 낙동의 물을 품는 의리를 지녔다. 이름에 하늘을 담은 자,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느냐며 말이다. 그리하여 길은 큰 물 품은 자로 곧장 향하는 모양이다.

 

정상에서, 해발 400여 미터쯤 되는 높은 곳에 위치한 천태호의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호수의 거대함이 정상의 시야를 한껏 틔워 놓아 동으로 양산 에덴벨리와 염수봉을 조망할 수 있고 동남으로 (양산)매봉산, 토곡산을, 남으로는 김해 무척산, 서북방으로 삼랑진 만어산을 볼 수 있다. 쭉 돌아, 시선은 다시 호수에 박힌다. 이 높은 곳에, 거 참 기이하다. 천태호는 삼랑진양수발전소의 상부 댐 저수지라고 한다. 심야의 잉여전력을 이용하여 하부 저수지인 안태호의 물을 이곳으로 퍼 올린 뒤, 낮에 다시 하부저수지로 흘려 보내면서, 그 낙차를 이용해 전력을 생산한다고 한다. 85년도에 첫 상업발전을 개시했다. 하부댐인 안태호와 낙차 높이가 88m라고 하는데 산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 그 깊이와 속내를 가늠하기 어렵다.

 

산은 주위 능선들을 모두 동원하여 천태호를 감싸고 있다. 무언가 소중함을 뺏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무엇일까, 문명의 이기가 달려들기 전의 아름다움일까. 가늠하기 힘든 물의 깊이를 제쳐 두고 내가 그릴 수 있는 이 호수의 옛 모습을 제멋대로 상상했다. 큰 물을 막고 선 거대한 댐의 제방을 머리 속에서 걷어내고 아름드리 나무들이 우거진 작은 소()를 그린다. 머리 박고 물 마시던 여우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관절에 힘을 쓰며 정지동작으로 서있다. 물고기가 튀어 올랐고 새가 건너편 나무에서 이쪽 나무로 날았다. 물이 생겨났고 하늘이 기지개를 켠다. 천태는 그 소를 온전히 품고 젖먹이를 끌어안은 여인의 팔꿈치다. 물을 그렇게 기르고 하늘을 그렇게 잉태했을 것이다. 이름과 맞지 않지만 천태(天台)를 천태(天胎)로 상상하고 끼워 맞추는 사이 산을 내려왔다. 다시 인간의 시간에 발을 디딘다. 잠시 천태와 우주적 시간에 놀다 온 것이 아찔한 황홀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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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30 07:20:23 *.52.254.239

늘, 지도를 들추고 소개한 곳을 찾아 더듬으며 상상하게 하는 글... 

그리고 행복한 시간 ...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늘 거기 그 이야기속 산에서 숨쉬고 있는 즐거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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