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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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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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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28일 09시 05분 등록
”부모님이 대체 어떤 분들이세요?“

강연을 가면 부모님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꼭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그간 해온 일들을 풀어놓다보면 어느순간 사람들의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대체 어느 부모가 딸자식이 혼자 무전여행을 하고, 세계여행을 하고, 히말라야를 오르고, 자전거여행을 하고, 수시로 직장을 바꾸는 등 하고 싶은 걸 맘껏 하도록 그대로 둘 수 있냐는 것이다. 듣고 보니 그랬다.  적어도 내 주위에 우리 부모님같은 분은 없었다. 친구들의 부모들은 으레 통금시간을 두고, 자식들이 공부에만 열중하도록, 그리고 위험한 일을 최대한 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셨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그런 분들이 아니었다. 내가 19살에 무전여행을 한번 해봐야겠다고 말을 꺼냈을 때, ‘젊을 때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지’라고 흔쾌히 찬성한 것도 어머니였다. 대학에 들어가 술마시고 노느라 날밤 샐때도 아버지는 통금은 커녕 ‘한번은 그렇게 놀아봐야 한다’고 기꺼이 봐주셨다. 덕분에 ”오늘은 밤새 술 마시고 내일 들어가겠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영어공부한다며 절에 들어가겠다는 내게 갈 만한 절을 소개시켜주신 것도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같이 김해에 있는 절까지 배웅을 해주셨다. 덕분에 내 인생에서 아주 값진 40일을 홀로 보낼 수 있었다. 나중에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가겠다고 했을 때도 부모님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셨다. 늦기 전에 세상 구경 한번 해보겠다고 통보에 가까운 말을 남기고 떠났을 때, 부모님은 ‘건강히 잘 다녀오라’고만 하셨다. 도통 하지말라는 말을 모르는 분들이었다.   

어렸을 때에는 그저 부모님이 무심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왜 부모님은 다른 부모님과 달리 잔소리를 안하실까, 왜 내가 알아서 하도록 그냥 놔둘까, 관심이 없으신걸까 서운한 마음도 있었다. 부모님이 바빠서 자식들을 ‘방목’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전혀 아니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육칠 년 전쯤 일이다. 하루는 아버지가 볼일을 보러 서울에 오셨다. 아버지는 서울에 오시면 막내인 나를 불러내 밥을 한끼 사주고 내려가셨다. 그날도 서울역 부근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감자탕을 먹으며 아버지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다. 당시 나는 책을 쓰겠다며 회사를 그만두었고, 사실상 앞날이 깜깜한 상태였다. 그런 내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아버지는 가타부타 말씀이 없으셨다. 백수가 된 자식이 걱정될 법도 하셨을 텐데, 직장이나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셨다. 대신 우리는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눴다. 밥을 잘 먹고 헤어질때까지 아버지는 내게 ‘잘하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으셨다. 대신 '잘 지내라'며 내게 악수를 건네고, 기차 타러 휘적휘적 가셨다. 

그런데 아버지는 악수만 건넨 게 아니었다. 무언의 눈빛도 함께 건넸다. 그 눈빛. 그때 처음으로 느낀 아버지의 눈빛은 내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널 믿는다’

순간 울컥, 했다. 잘하라는 백마디보다, 걱정하고 있다는 천마디보다, '내가 널 믿고 있다'는 무언의 눈빛. 그 눈빛이 내 마음에 큰 동요를 일으켰다. 당시 나는 되는 일이 없다는 생각에 자존감이 많이 낮아진 상태였다. 그런데 그날 아버지의 눈빛이 내게 이런 확신을 심어주었다.   
   
‘이런 훌륭한 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결코 잘못될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훌륭한 분이 낳아주었다면, 나는 결코 못난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이렇게 훌륭한 뿌리를 가진 이상, 뭐가 됐든 되어야겠다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최대한 활용해서 해봐야겠다고. 절대 쉽게 포기하지 않겠다고... 그때 나는 정말로 더 잘 살고 싶어졌다. 간절히. 

생각해보면 부모님은 한 번도 내 앞에 서 있지 않으셨다. 대신 내 뒤에 서 계셨다. 내가 알아서 길을 갈 수 있도록 앞을 틔워주셨고, 필요할 때만 뒤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덕분에 나는 인생의 많은 결정을 직접 해왔다. 고등학교도 내가 정했고, 대학교도 내가 정했고, 가고싶은 학과며 직장도 모두 내가 정했다. 인생을 어떻게 살지도 내가 정했다. 부모님은 하라 마라 잔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5남매를 키우다보니 일일이 간섭하기도 어려웠겠지만, 가능하면 자율에 맡기는 게 부모님의 방식이었다. 

나는 청개구리 기질이 강해서 누가 하라고 강요하면 오히려 반대로 하는 습성이 있다. 만약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했다면 아예 책도  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부모님이 잔소리를 하지 않은 덕분에 오히려 알아서 더 열심히 공부했고, 더 열심히 살려고 했다. 어릴 때 하루는 친구들의 놀림에 한바탕 싸움을 하고 들어오자,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가치는 니가 정해야지. 남들이 너를 놀릴 때 니가 거기서 화내고 발끈하면 그걸 인정하는 게 되는거야."

진정한 사랑은 그 사람이 자신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좋은 사람처럼 느끼게 한다. 그동안 내가 잘나서 이렇게 살아온줄 알았더니, 알고보니 다 부모님 덕이었다. 부모님은 완벽한 분들은 아니지만, 내가 만날 수 있는 최고의 부모님이었다. 지구상에서 최고의 부모님을 만난 큰 행운에 깊이 감사한다. 

"가족이 지니는 의미는 그냥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지켜봐주는 누군가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 
-미치 앨봄

IP *.181.106.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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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8 10:01:26 *.227.216.169

울컥했습니다.

김글리님 응원합니다.

부모님 항상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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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8 17:38:13 *.181.106.109

저도 쓰면서 울컥했네요.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한 이웃님도 늘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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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8 10:33:57 *.192.197.203

아이 둘의 아빠로서 저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네요. 내 아이들이지만 나의 소유물이 아닌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려고 노력할께요.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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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8 17:39:08 *.181.106.109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마다, 부모마다 교육철학은 모두 다르시겠지만,

근간은 자식을 있는 그대로를 존중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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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8 12:56:05 *.138.247.98

김글리님 멋진 부모님이 계셨군요.
과잉보호가 만연한 우리나라에서,
생각해야할 부모님상을 제시해주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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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8 17:41:24 *.181.106.109

그런 면에서 제게는 최고로 잘 맞는 부모님을 만났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게 자유롤 허용해준 지금의 부모님이 아니라 과잉보호를 하시는 부모님이 계셨다면, 

지금과는 좀 다른 삶을 살았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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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30 07:17:19 *.52.254.239

전, 친구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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