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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마음을

마음을

2006년 9월 19일 01시 43분 등록

내 집에 좋은 물건이라곤 단지 <맹자> 일곱 편뿐인데, 오랜 굶주림을 견딜 길 없어 2백전에 팔아 밥을 지어 배불리 먹었소. 희희낙락하며 영재(泠齋) 유득공에게 달려가 크게 뽐내었구려. 영재의 굶주림도 또한 하마 오래였던지라, 내 말을 듣더니 그 자리에서 <좌씨전>을 팔아서는 남은 돈으로 술을 받아 나를 마시게 하지 뭐요. 이 어찌 맹자가 몸소 밥을 지어 나를 먹여 주고, 좌씨가 손수 술을 따라 내게 권하는 것과 무에 다르겠소. 이에 맹자와 좌씨를 한없이 찬송하였더라오.

- 이 덕무(1741~1793)가 이 서구에게 보낸 편지 中 (‘미쳐야 미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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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날 갑자기 친구가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나는 무슨 영문인가 싶었는데 그 친구 왈 ‘책을 읽다가 벗이라는 말이 가슴에 박혀서 왔다네. 오늘 읽은 이야기 하나 해줌세.’라며 곧장 이 덕무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덕무는 서얼 출신임에도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癡: 책만 읽는 멍청이)라 부를 정도로 책 읽는 것을 좋아한 조선후기의 실학자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재주와 노력이 있다 한들 계급적 한계가 명백했던 당시의 사회에서 책 읽는 것이 어찌 그리 재미있었을까요? 어느 날, 그는 주린 가족을 보다 못해 손때로 얼룩진 <맹자>를 팔아 배를 채우고 친구 집에 가서 헛자랑을 합니다. 이에 가난하기로는 매한가지인 친구도 그의 쓴 웃음에 마음이 아파 자신이 아끼는 <좌씨전>을 팔아 술대접을 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요일에 만난 친구는 근 10년 동안 하는 일이 잘 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는 지난 십년을 회고하면서 ‘모든 잘못은 나의 덕이 부족하고 정직하지 못해서인 것 같아. 이제라도 가난하지만 정직하게 살고 싶다.’는 말로 앞으로의 삶을 다짐했습니다. 저는 그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딴지를 걸었습니다. 그가 가진 정직과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지금의 어려움을 만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충고 아닌 충고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저 역시도 그래 놓고 무언가 마음에 걸렸나 봅니다. 여러 번 뒤를 돌아보게 되더군요. 왠지 그의 어깨가 외롭고 쳐져 보였습니다.

어제 다시 그 대목을 읽으며 책장을 덮기도 전에 후회의 마음이 밀려왔습니다. 그는 책을 팔아 술을 사주는 친구를 바라지는 않았더라도 자신의 힘든 결정을 마음으로 지지해줄 친구를 생각하며 먼 길을 달려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생활고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부터 한문 공부를 다시 하고 있습니다. 당장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그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이 그를 끝없이 외면하고 친구조차 그의 뜻을 헤아려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선택한 그 외로운 길을 오늘도 묵묵히 걸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친구가 새삼 자랑스럽습니다. 친구야! 힘내!

- 2006. 9. 19 週 2회 '당신의 삶을 깨우는' 문요한의 Energy Plus [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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